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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11. 2021

25. 우리들 이야기

그래, 내가 그 찐따다

어제 졸업식을 마치고 나는 백수가 되었다. 집에만 있자니 엄마 눈치가 보여서 오늘은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소서도 쓰고 인적성도 풀면서 보람찬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아침을 먹고 10시에 나섰다. 오랜만에 아침 햇살을 받으니 부지런해진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그런데 도서관에 도착한 순간 깨달았다. 오늘은 3·1절이라 휴관이었다. 어쩐지 도서관 앞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 여자애들 두 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저 바보 멍청이가 왜 왔나 싶어 자기들끼리 속닥거렸을 것이다.     


나는 도서관을 뒤로하고 카페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서 믹스 커피를 이미 먹고 온 터라, 다시 커피를 마셔야한다고 생각하니 가기 싫어졌다. 날씨도 좋은데 공원에서 공부할까 싶어서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가기 전에 살던 곳이라 지리는 빠삭했다. 공원에 도착하니 할아버지 한 분이 가만히 앉아 멍 때리고 있었다. 공원에 할아버지랑 둘이 있자니 괜히 뻘쭘해서 다시 카페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5분 거리에 있는 던킨 도넛으로 가려다가 내가 나온 중학교 근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 빈 교실에서 공부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구경도 할 겸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점점 가까워지자 정문이 닫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닐 때 항상 교실 문을 잠갔던 것이 생각나자 괜히 왔다 싶었다. 다행히 학교 정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려니 학교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가방을 매고 자연스럽게 교실로 향하던 것이 아득히 먼 옛날같이 느껴졌다. 하긴 진짜 옛날이었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CCTV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학교 건물 안에 들어가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후문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거기 아저씨, 누구세요?”     


뒤돌아보니 학교 수위 아저씨였다. 나는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기가 싫어서 뛰기 시작했다. 내가 뛰자 아저씨의 의심이 증폭됐나 보다. 아저씨도 뒤에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뛰었다. 어찌나 열심히 뛰었는지 숨이 너무 가빠서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써야 했다. 문득 정신이 들자 내가 왜 뛰었나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정신 차리고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에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괜히 반가웠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내가 놀던 놀이터가 그대로 있었다. 오랜만에 그네가 타고 싶어졌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네를 타고 있는데 어린애들 한 무리가 몰려왔다. 약간 민망했지만 아까 일도 있고 해서 당당해지기로 했다. 자기들끼리 미끄럼틀 쪽에서 놀더니 갑자기 그네를 타러 우르르 몰려왔다.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자 나머지 세 명이 나를 쳐다봤다. 그네를 타고 있던 애가 대장이었는지 모두를 대표해서 나한테 말을 걸었다. “어른이 양보해야죠!”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내가 먼저 왔으니까 내가 다 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내가 확고하게 얘기하자 애들이 떠나려고 했다.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양보하고 싶진 않아서 내버려 뒀다. 그런데 애들이 떠나면서 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 아저씨 뭐야.” “백수인가 봐.” 나는 순간 욱해서 애들을 불렀다. “야, 너네 일로 와봐!” 애들이 순순히 내 앞으로 왔다. 나는 그네에 앉아 있었고, 애들은 그런 나를 빙 둘러 서있었다.     


이 중에 공부 잘 하는 애가 있냐고 물었다.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반에서 1등 하는 친구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명이 자기 반에 선영이라는 애가 항상 1등이라고 했다. 옆에 있는 애가 선영이는 수학 경시대회에서도 상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괜히 우쭐해져서 내가 그 나이 때에는 선영이 같은 애였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계속 조용히 있던 애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공부도 잘 했는데 지금은 왜 그래요?” 나는 그 아이의 말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선, 나는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는 점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지금도 나쁜 상태는 아니며 더 괜찮아질 일만 남았다고 말해줬다. 아이들은 똑똑한 형인 거 알겠다며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아이들과 헤어지고 카페로 향하는데 배가 고팠다. 근처에 용식이가 사는 게 생각나서 용식이에게 밥이나 먹자고 전화를 걸었다. 용식이는 편의점에서 알바 중이라고 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용식이도 만날 겸 편의점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용식이는 원래 이번에 졸업하려고 했는데 막 학기에 한 과목이 F를 받아서 졸업하지 못했다고 했다. 용식이와 수다를 떨다보니 벌써 오후 4시였다. 휴일이니까 이 정도는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가벼워져서 용식이와 가볍게 맥주도 한 잔했다. 용식이와는 해가 저물고서야 헤어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깨가 묵직했다. 하루 종일 노트북이랑 책이 든 가방을 매고 다녀서 인 것 같았다. 내일은 그냥 집에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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