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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11. 2021

26. 카페인 중독과 항문외과

카페에서 생긴 일

여자와 남자가 카페에 앉아있다.     


여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커피 중독인가 봐요. 하루도 커피 없이는 못 살겠어요. 몸이 안 좋아지는 거 같아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더니 ‘카페인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10가지 증상’이 나오더라고요. 그중 8 문항에 체크했어요. 큰일이에요. (손가락으로 세며 기억을 더듬는다) 1.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처지는 것 같다. 2. 밤샐 때 커피는 필수다. 3. 속 쓰려도 커피를 못 줄인다. 4. 소변을 자주 보며 설사가 잦다. (깜짝 놀라며) 죄송해요. 오랜만에 본 건데 더러운 얘기를 했네요.     


남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뇨, 괜찮습니다. 제 전문 분야인 걸요. 병원에서도 카페인 중독된 분들이 많으십니다. 만성적인 거면 한 번 병원 가셔야겠어요.     


여자: (뭔가 생각하는 표정) 의사셨죠? 분야가 뭐였죠? 제가 원래 기억력이 안 좋아요.     


남자: (놀랍지 않다는 듯이) 항문외과요. 병원은 여기서 10분 거리에 있어요. 김철수 항문외과라고.     


여자: 아! 기억나네요. (시간을 확인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제가 점심시간을 뺏고 있는 거 아니죠?     


남자: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아침부터 수술을 하고 왔더니 입맛이 없습니다. 잠깐 쉬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근처엔 웬 일이시죠?     


여자: 회사가 이 근처에요.     


남자: (놀란 표정, 급히 감춘다) 아……, 그러시구나.     


여자: 네……, 다닌 지 꽤 됐어요. 오늘은 출장이 있어서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에요. (잠깐 생각하더니) 항문외과 의사인 줄은 몰랐네요. 한 가지 여쭤 봐도 되나요?     


남자: 아……, (시계를 보며) 곧 있으면 가야해서…….     


여자: 아주 잠깐이면 돼요. 제 친구가 치질 같은데 병원을 못 가고 있어요. 이게 사실 부끄럽잖아요.     


남자: 그렇죠.      


여자: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주위를 살펴보며 작은 목소리로) 항문에 뭔가 튀어나온 게 만져진데요.     


남자: 의심이 갑니다만, 확실히 치질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굉장히 친한 분이신가 봐요?     


여자: 고등학교 친구에요. 치질이 맞나요?     


남자: 전문용어로는 치핵이라고 하는데, 병원 오셔서 검사를 받아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심한 정도에 따라서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고요. 증상이 오래됐으면 병원 오시는 게 맞습니다.     


여자: 최근에 해외출장을 다녀왔는데, 그때 변비에 걸렸나 봐요. 예민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4박 5일을 갔는데 한 번도 화장실을 못 갔나 봐요. 그러고는 한국 와서 애쓰다가 그렇게 됐다 네요.     


남자: 원래 변비에서 치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비 때문에 장시간 변기에 앉아 있다 보면 생기는 부작용이죠. 우선 변비는 치료하셨나요?     


여자: 요즘 유산균을 먹고 있긴 해요. 그런데 제가 원래 이틀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가는데 이것도 변비인가요? 아니, 제 친구가요. 친구 역할에 너무 몰입했나 봐요. 호호.     


남자: 규칙적이기만 하다면 변비는 아닙니다. 진료 예약하시고 병원에 오십시오. 저도 진단해봐야 알아서요. (명함을 내밀며) 명함 여기 있습니다.     


여자: 이렇게까지 됐으니,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이야기한다) 사실 그 친구가 저에요. 도저히 부끄러워서 못 가겠더라고요. 인터넷에서 치질 수술 과정을 찾아봤는데 그렇게 굴욕적인 수술이 없던데요. 밑에는 아무 것도 안 입은 채로 쭈그리고 앉은 다음에 그 상태로 테이프를 칭칭 감고 의사랑 간호사들이 제 항문을 쳐다보며 주사를 놓고 칼을 댄다는데........      


남자: 힘드시겠지만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이야기한다) 사실 저도 병원 밖이라서 말하는 건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남의 항문이나 보려고 했나 하는 자괴감 말이에요. 물론 항문은 사람 몸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죠.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 주셔야 해요. 항문을 보이는 환자분들도 힘드시지만, 남의 항문을 쳐다봐야 하는 저희도 힘들다는 걸요. 저희도 정말 민망하고, 뚫어지게 쳐다볼 때마다 죄송스러워요. 그러니까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으세요. 환자와 의사 모두한테 민망한 작업이니까, 없던 일처럼 아무 말도 안 하면 돼요. 아마 인터넷에 수술 과정 올리신 분만 없으시면 의사와 환자 사이의 비밀로 유지됐을 거예요. 그러면 그 부끄러운 일이 알려지는 경우도 없고요. 그리고 저희는 수천 개의 항문을 대하다 보니까 비웃고 그러지 않아요. 이비인후과 의사가 귓속에 귓밥 보고 웃는 일 봤습니까? 저희한테 항문은 그냥 항문일 뿐인 거예요.     


여자: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신뢰가 가네요. 그런데 다시 한 번 죄송한데, 저희가 어떻게 알게 된 거죠?     


남자: 앞집 사람입니다.     


여자: 아....... 어쩐지 어디서 많이 봤다 했어요. 너무 빤히 쳐다 보시길래 아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저 아세요?


남자: (어이 없다는 표정) 그쪽이 너무 쳐다봐서 저도 쳐다본 겁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 도넛 방석 들고 계셔서 처음부터 본인 이야긴 줄 알았어요. 꼭 병원에 상담 받으러 오세요. 벌써 6개월은 된 거 같던데.     


여자: 네, 그래야죠. 그런데 저는 점심시간이 끝나가서 그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여자가 일어선다.)     


남자: 커피 끊으시고, 물 많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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