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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11. 2021

27. 절망의 시대와 낙관주의

그래야만 하는가?

경마장에서 면접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자가 하나 보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최종면접에 사장님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운데 앉아있었다. 이번 상반기에 유일하게 끝까지 간 회사였기에 나는 절박했다. 그래도 이것만 잘 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어왔다.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우리가 왜 당신을 뽑아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경력사항에는 아무런 열정을 찾아볼 수 없는데요.”

“저의 열정은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 것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망했다. 이후에 들어온 질문들은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 터덜터덜 면접장을 나오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4악장을 틀었다. 베토벤은 악보 첫머리에 이렇게 써놨다고 한다.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이 문장들은 악장 전체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음악이 시작되고, 사장님의 첫 질문이 이어폰을 통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당신을 뽑아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하는가?’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열심히 살았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 배우를 꿈꾸며 연기 학원을 다녔지만 입시에 실패한 후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만뒀다. 그리고 연기 학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성악을 시작했다. 운이 좋았는지 일 년 만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별 생각 없이 1학년을 보내다가 군대를 갔다. 제대 후 어물쩍거리며 2,3학년을 보내다가 4학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성악으로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어울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떠올렸다. 경력이 없어도 목소리와 발성이 좋으니 가능할 것 같았다.    

 

이어폰 너머로 합창이 시작했다. 실기평가를 받았던 곡이라 대충은 가사를 알았다. “땅바닥을 기는 벌레들도 축복을 받는다!”라는 가사가 방금 지나갔다. 열정에 등급이 있다면 내 열정은 땅바닥을 기는 벌레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땅바닥을 기는 벌레는 축복받지 못한다.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부터는 부모님이 놀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열정은 의미가 없다. 세상이 열정에 대한 증거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를 함께 준비하는 동생과 술을 먹으면서 나눈 대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으로 면접까지 간 기쁜 날이자, 처음으로 한계를 느낀 슬픈 날이었다. 면접관은 오늘처럼 내 열정을 의심했고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했다. 그래서 동생에게 하소연했다.


“열심히 하면 뭐해.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경력사항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내가 열정적이지 않은 거래. 뽑아줘야 경력을 쌓지. 그리고 인턴은 아무나 하나? 그거 다 빽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형 열심히 하는 거 알죠.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학교 방송부 활동도 없는 건 형 잘못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인맥으로 인턴 한 거 아니에요. 정색해서 미안하지만, 형이 아무 것도 안 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형은 열심히 하니까. 힘내요.”


말문이 막혔다. 내가 갈팡질팡했던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일까?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해서, 그것만 바라봤다는 인생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어야하는 건가? 그렇지 않아서 나는 누군가 당신을 뽑아야만 하냐고 물어도 그래야만 한다고 당당히 말 할 수 없는 걸까? 운명 교향곡 속 영웅처럼 환호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걸까?     


경마장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천재 경주마 스피릿! 끝까지 단독선두를 지키고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천재 경주마라는 단어가 이어폰을 뚫고 들려왔다. 경주마가 천재 소리를 듣는 이 시대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천재 경주마가 우승할 수 있던 것은 열정 덕분이 아니다. 천재 경주마는 타고난 혈통과 철저한 관리와 위대한 조력자들의 결과물이다. 천재 경주마는 열정적으로 달리지 않았지만, 달리다보니 선두에 있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 제목이 생각났다.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열정 타령하는 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뒤돌아보니 창식이 형이었다. 나는 이어폰을 빼면서 반가운 척 인사했다. 창식이 형은 나처럼 아나운서 지망생이었지만,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이것저것 하다가 결국 마필관리사가 됐다. 나는 형에게 천재 경주마에 대한 내 생각을 말했다. 형은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듣더니 내 말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다 조작된 거야.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 천재 경주마가 탄생하려면 확실한 빽이 필요해.” 결국은 빽이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형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라는 듯이 말했다. “너도 이제 딴 것도 생각해봐.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거면 운명이 아닌 걸 수도 있잖아. 꼭 이거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옆에 있던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시 한 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면접장에서의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아나운서여야만 하는가? 꼭 그래야만 하는가? 벌써 준비한 지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벌써 스물아홉이었다. 최종에서는 계속 미끄러졌다. 눈을 낮춰도 마찬가지였다. 창식이 형은 내가 스스로에게 차마 할 수 없던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창식이 형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질문에 답해야 했다. 내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해야 했다. 나는 왜 아나운서가 되려고 하는 걸까? 간절히 바라던 꿈이어서? 노력한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 관성으로?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현대를 저는 절망의 시대라고 불러요. 물론 지금만 절망적인 건 아니죠. 전쟁이 일어난 때도 절망의 시대고, 공산주의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때도 절망의 시대죠. 하지만 중요한 건 절망의 시대에 아무도 절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외쳤어요. 군중들의 환호 속에 영웅처럼 행진하는 날을 꿈꾸고, 냉전이 종식된 날에 거리에서 환호하는 날을 꿈꾸면서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절망의 시대라는 절벽에서 낙관주의라는 밧줄을 붙잡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서 저는 꿈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꼭 아나운서여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아나운서라는 꿈도 꿀 수 없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형은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절망의 시대에는 꿈을 꾸는 대신 푹 자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말들 씻기러 가야해서....... 다음에 시간되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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