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드 Jan 12. 2021

28. 솔직하지 못한 겁쟁이의 변명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

우리 아빠는 군대 있을 때 별명이 '이빨'일 정도로 말이 많은 편이지만, 정작 중요한 얘기는 안 한다. 나는 아빠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어느날 아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다고 느꼈다. 아빠는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그래서 고민 따위 없는 사람 같다. 실제로 아빠는 스무살 때까지 사람들이 왜 인상을 찡그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한다. 아빠의 고민 없어 보이는 삶은 아빠의 입 만큼이나 가벼워 보였다. 그냥 그랬다.


어느날 나는 내가 아빠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빠를 닮아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친구를 만나면 몇 시간이고 재밌는 얘기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인생의 갈림길에 서서 나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2019년 겨울이었다. 친구에게 내 고민을 토로했다. 힘들다고도 말했던 것 같다. 친구는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고민 같은 거 없어 보였는데, 너도 고민이 있구나."


그때 깨달았다. 나는 가벼운 대화를 추구한다는 걸, 내 진짜 고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아빠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걸 말이다. 나는 진짜 고민은 마음 속에 담아두는 편이다. 솔직하지 못한 편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솔직한 건 약해보이는 거란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하고 있던 걸까? 남들에게는 행복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가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도 겁쟁이일까? 나는 엄마를 통해 가끔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고 알게 된 사실들이 많다고 했다. 아빠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엄마는 결혼하고 첫 번째 부인의 제사를 지내면서도 그분이 누군지 몰랐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첫 번째 부인과 사별 후 재혼한 것인데도 아빠는 밝히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재혼한 것이란 사실을 최근에 엄마를 통해 알았다. 아빠보다 스무 살 많은 고모는 할머니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마흔이 넘어서 아빠를 낳았다. 엄마는 그 사실도 아빠에게는 어린시절부터 콤플렉스였을 거라고 했다. 하긴 초등학생이 나이 많은 부모나 누추한 부모를 창피해 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동생인 나의 삼촌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결혼 후에 알았다고 했다. 나는 아빠가 재주 많은 삼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기에, 삼촌의 존재도 숨기고 싶어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삼촌의 존재도 아빠의 콤플렉스였을까?


솔직한 사람들은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하지 못한 나는 아빠가 이해가 간다. 나는 콤플렉스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다. 콤플렉스를 드러내면 사람들이 나를 얕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 나는 동정심을 싫어한다. 동정받기도 싫고, 동정하기도 싫다. 나는 아빠가 나와 같은 심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에 아빠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르는 것들을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과거 나의 콤플렉스는 내 주소였다. 고등학교가 전국 단위 모집인 곳을 갔다.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 내  친구가 내 주소를 보더니 말했다. "읍면동 주소는 처음 봤어."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는 시골 출신인 게 창피했다. 남들과 주소 단위가 다르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대학에 가서도 한동안은 주소를 숨기려고 했다. 여름방학에 우리집 주소로 엽서를 보내겠다는 친구의 말에 난감해 했던기억이 난다. 그땐 그랬다.


말했듯이 나는 겁쟁이다. 나의 주소 콤플렉스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더이상 나의 콤플렉스가 아니기 때문이다.(살다보니 콤플렉스가 아니게 됐다.) 나는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콤플렉스나 진짜 고민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도 내가 솔직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에게 손가락 욕을 했던 일화는 일 년이 지나서야 친구들에게 우스게 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3일 연속으로 똥 밟은 일화도 중학생이 되고서야 말하고 다녔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글로 쓸 수 있던 것은 (창피한 일화라고 적어놓긴 했어도) 더 이상 창피해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순덩어리다.


나는 현재의 고민들을 털어버리고 싶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내가 현재 취준생으로서 하고 있는 고민은 차마 못 쓰겠다고 느꼈다. 요즘은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크면서도 차마 연락하지 못하는 상태다. 숨기려고 해도 나의 절망감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서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많이 힘들어 보인다는 얘기가 꼭 나온다. 취준 생활이 길어진 탓에 즐거운 일상이 소멸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우울하다는 사실을, 막막하다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최근엔 그 정도가 심해져서 모든 걸 털어놓던 엄마에게도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픽션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봤을 때, 픽션은 겁쟁이들을 위한 장르다. 나는 항상 소설이 끌렸다.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나를 숨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칼럼 매캔은 <젊은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소설쓰기를 스트립쇼에 비유한다. 일명 '반대로 스트립쇼'다. 소설가는 처음 무대에 등장할 때 옷을 전혀 입고 있지 않다. 본연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씩 옷을 입는다. 본연의 모습을 완벽히 가리고, 더 나아가 본연의 모습을 못 알아볼 정도로 몸을 왜곡한다. 소설쓰기란 자신의 경험에 허구를 덧대는 행위란 설명에 대한 은유다.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다. "본인의 이야기인가요?" 소설가들의 답변은 항상 똑같다. "제 이야기가 없다고 말할 수 없겠죠. 하지만 소설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픽션에는 내 이야기가 어느 정도 들어가 있지만, 내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겁쟁이들에게는 방패가 된다.


나는 너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솔직해질 수 없는 순간에 픽션을 쓴다. 남의 입을 빌려 나의 콤플렉스 또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러곤 변명을 덧붙인다. '제 고민이 포함된 건 맞지만, 완벽히 제 고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소설 속 화자의 고민이니까요.'


나는 그래서 소설을 쓴다. 솔직하고 싶지만, 솔직할 수 없는 겁쟁이에 모순덩어리여서 소설을 쓴다.




나처럼 솔직하지 못한 당신이라면, 그래서 말할 곳이 없어 괴롭다면, 소설을 써보길 감히 권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27. 절망의 시대와 낙관주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