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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12. 2021

29. B형 남자친구

믿음은 현실이 된다

재영은 소개팅에서 미소라는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재영은 약속시간 보다 20분 일찍 도착해 있었다. 제대하고 난 뒤 첫 소개팅이라 잔뜩 긴장해 있었다. 미리 받은 사진을 다시 확인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진과 실물이 같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알만 한 나이였기 때문에 실물이 사진과 다르더라도 어느 정도 감안해서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재영은 첫눈에 그 여자가 미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진과 똑같이 예뻤다. 재영은 미소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첫눈에 반한 남자는 어떻게든 상대방 취향에 맞추려고 애쓴다. 미소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면 재영도 커피를 좋아한다고 했고, 미소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재영은 영화 얘기를 늘어놓았다. 공통점을 찾아가는 대화를 나누면서 재영은 미소도 재영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참 영화 얘기를 하고 있는데 미소가 맥락에 관계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     


재영은 이 가벼워 보이는 질문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테이블 너머 미소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미소에게 가는 마지막 관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혈액형은 왜요?” 질문을 하는 재영의 목소리에는 혈액형과 관련된 미신을 믿는 사람에 대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미소는 재영의 반문에 당황한 듯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기가 딱히 혈액형별 성격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자기는 B형 남자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재영은 미소의 말을 듣고 뜨끔했다. 재영은 B형이었다. 그래서 재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거 참 다행이네요. 저는 O형이거든요.” 미소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자기도 O형인데, 왠지 재영도 O형일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세 번째 만남에서 재영은 미소가 혈액형에 집착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미소는 인생에서 두 명의 남자를 사랑했는데, 둘 다 B형이었고 미소에게 실망만 안겨줬다고 한다. 첫 번째 남자는 미소보다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데이트를 하다가 친한 동생이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미소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났다고 한다. 미소는 자신이 1순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를 붙들고 달라지겠다고 맹세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한다. 두 번째 남자는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미소 말에 따르면, 전형적인 B형 남자답게 상습적으로 양다리 걸치는 남자였는데, 남자의 노련미와 자신의 눈에 씐 콩깍지로 인해 3개월 동안 몰랐다고 했다. 두 번째 남자친구를 얘기할 때 미소는 울먹이기까지 했고, 재영은 미소를 다독이며 자기는 절대 그렇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사귀자고 고백했다.     


재영은 미소가 수락하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미소가 모든 것을 털어놓은 마당에 거짓말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미소는 재영의 진심은 보지 않고 거짓말 한 것에 대해서만 죄를 물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재영은 또 다른 실망스런 B형 남자가 될 터였다. 그래서 재영은 절대로 들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미소가 진짜로 B형 남자와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도, 그 자신이 미소에게 잘 해주면 해결될 미신이라고 생각했다. 재영은 다시는 미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결심을 지키기가 힘들었다. 미소는 생각보다 훨씬 더 혈액형에 관심이 많았다. 궁합 보는 앱을 다운 받아 혈액형 궁합을 보면서 잘 맞는다고 좋아했다. 실제로 둘은 소울메이트가 있다면 둘을 위한 말이 아닐까 할 정도로 잘 맞았다. 재영이 미소를 사랑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재영이 싸움을 회피하는 성격이라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달리 말하자면, 재영의 마음속에는 미소에 대한 사랑과 함께 불만이 자라나고 있었다.   

  

재영이 생각하기에 미소는 상냥하지만 동시에 답답한 성격이었다. 수능 성적에 따라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타인을 도와주는 것을 사명감으로 여겨 사회복지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미소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소가 착한 것은 맞지만, 재영은 혈액형과 관련된 미신을 믿는 것과 맹목적으로 봉사하는 것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며, 미소가 답답한 또는 아둔한 사람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재영은 미소에게 왜 그렇게 봉사를 열심히 하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미소는 마땅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좋은 일이고 하고나면 기분이 좋아서라고 했다. 재영은 착한 것이 착한 것이라고 하는 미소가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미소는 재영에게 계속해서 헌혈을 하러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 재영은 헌혈을 함께 하러 가자는 미소의 말에 당황에서 이번 달에는 이미 했으니 다음 달에 가자고 말했다. 지영은 이 말을 뱉고 난 뒤 한 달 동안 헌혈을 거절할 변명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특별한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고, 어느 날 미소가 재영의 손을 잡고 헌혈의 집으로 갔다. 재영은 헌혈의 집을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미소를 멈춰 세웠다. 재영은 미소의 손을 꼭 잡고 할 말을 생각했다. 그러다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너의 봉사활동에는 목적이 결여되어 있어. 말할까말까 고민했는데, 착한 일에 대한 너의 집착은 병적이야.”     


미소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내가 매달 헌혈하는 게 정신병이라는 거야?”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한테도 강요하는 걸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헌혈하기 싫으면 그냥 하기 싫다고 하면 되잖아.”     


미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재영은 미소의 말을 듣고 그럴 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잘못을 인정하기엔 재영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영은 자신의 의견을 계속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러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다른 얘기까지 하게 됐다.


“혈액형을 믿는 건 멍청한 일이야.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믿어주는 척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재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의 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증거로 난 사실 B형이지.”


재영의 말이 끝나고 한동안 주위가 조용해졌다. 미소는 이제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그까짓 거짓말을 친 거였냐며 헤어지자고 했고, 자리를 떠났다.

    

미소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려다가 눈물이 멈추질 않아 지하철 화장실 맨 끝 칸에 들어갔다. 미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생각했다. 하지만 많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자명했다. 재영이 B형이라는 사실이었다. 생각이 명확해지자 미소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미소는 다시는 B형 남자를 만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려는데 뒤에 어떤 남자가 미소를 불렀다. “지갑 떨어뜨리셨어요.” 미소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뒤를 돌아섰다. 미소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꿈꾸던 이상형의 남자가 서있었다. 미소는 남자에게 지갑을 받고 멀뚱히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미소의 눈길을 눈치 채고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봤다. 마침 미소가 내려야 하는 역이었다. 미소는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B형이세요?”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 미소를 쳐다보더니 대답해줬다. “네, 그런데 티가 나나보죠?” 미소는 대답하지 않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구를 찾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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