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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4. 2021

5. We'll Meet Again

사람들은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한다. 여행이란 비일상적인 순간은 보통 사진으로 기록된다. 나 역시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기억하고 싶다는 열정이 강했던 초반에는 달리는 기차 밖의 풍경을 동영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첫 여행지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였다. 이 여행을 마치고 내가 느낀 점은 사진은 추억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앨범 용량이 늘어날수록 사진 속의 추억은 옅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이후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음악 속에 그날의 분위기를 넣는 것이었다.

특정 도시를 가면 한 가지 노래만 들었다. 그냥 듣고 싶은 노래를 하나 고르면 됐다. 혼자 베를린에 갔을 때는 이상하게도 이소라의 '청혼'이 듣고 싶었다. 넓은 베를린 도시를 걸어다니면서 지겹도록 '청혼'을 들었다. 그래서 내게 베를린은 산들거리는 봄바람으로 기억된다. 프랑스와 독일 경계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에서는 퀸의 'Love of my life'를 들었었다. 스트라스부르를 떠나기 전에 버스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그날 버스가 3시간 넘게 늦었다.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고개가 빠지도록 버스를 기다렸다. 나와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간절히. 내게 스트라수부르는 간절함으로 기억된다.

그날의 노래를 들으면 그날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유럽 교환학생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것은 'We'll Meet Again'이란 곡이다. <500일의 썸머> 여자 주인공으로 유명한 주이 디샤넬(Zooey Deschanel)이 보컬로 활동하는 She&him이 커버한 곡으로 들었다. 당시 주이 디샤넬을 좋아했다. 주이 디샤넬이 나온 영화와 드라마는 모두 찾아봤다. 영화 <예스맨>, 미국 드라마 <뉴걸>이 그것들이다. 그러다 그 앨범들까지 통째로 다운받게 된 것이다.

She&him이 추구하는 음악은 내 취향과 맞았다. 요즘 노래 같지 않고 올드해서 빈티지 향이 물씬 났다. 앨범에 수록된 곡을 하나씩 들어보다가 발견한 것이 'We'll Meet Again'이다. 독일에 있을 때 북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에 살았다. 항구를 매일 같이 배회하다 보면 노르웨이로 떠나는 거대한 크루즈를 자주 마주할 수 있었다. 출발할 때는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나는 걸으면서 항상 'We'll Meet Again'과 함께였다. 모르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는 거대한 배를 보면서 노래를 듣고 있으면 괜한 그리움이 일었다.(괜히 궁상인 게 맞았다.)

​노래 가사 내용은 아주 손쉽게 요약된다. 떠나는 화자는 누군가에게(아마 친구에게) 먼 훗날 좋은 날 꼭 만나게 될 거라고 다짐하듯이 말하는 것이 노래 가사의 전부다. 찾아보니 이 노래는 세계2차대전 당시에 발매돼 크게 히트를 쳤다. 전쟁터로 떠나는 장병들과 아들 또는 연인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에게 크게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래는 뭔가 웅장하고 희망에 차있다. 그리고 확신에 차있다. 너무 확신해서 오히려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 만날 거야'로 말한다.

​내가 머문 도시는 안개가 자욱한 독일의 북부 도시였다. 1년 365일 중 한달 빼고는 하늘이 흐렸다. 오늘 같이 주변이 뿌옇거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이 노래를 들으면 나는 그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느낀다. 흐린 하늘을 보면 노래 가사 탓인지 알지 못할 그리움이 일렁인다. 그렇게 'We'll Meet Again'은 내게 흐린날의 혼자만의 추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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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노래는 나의 감상과 무관하게 세상에 기억되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마지막 장면이 나온 후에 그렇게 됐다. 'We'll meet again'을 부르는 희망찬 목소리와 함께 핵폭발 장면이 나온다. 온 세상이 펑펑 터진다. 멸망이다. '핵전쟁으로 공멸하지만 우리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그럴거야.'라고 비꼬아 말하는 듯한 느낌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마지막 장면에 이 노래가 수록된 후 사람들은 이 노래를 그로테스크하게 기억했다. 그래서 비교적 최신인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서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만나는 가장 기묘한 순간에 이 노래가 절묘하게 등장하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가 논의되던 상황에서 약간은 황량한 분위기의 길거리를 걷는 내 머릿속에 이런 공상이 스쳐갔다. 3단계 격상이 시작되는 밤12시에  텔레비전에서 옛날의 애국가처럼 'We'll Meet Again'이 나온다면 꽤나 감미로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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