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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16. 2021

33. 유행에 관한 고찰

나는 군계일학의 닭이다

2017년 여름 나는 '인문학 산책'을 다녔다. 인문대 필수 교양 수업이었다. 내가 선택한 수업의 교수님은 열정적인 분이었다. 한 학기 동안 7권의 책을 읽었다. 매주 새로운 책을 읽어와야 했다고 보면 된다. 내가 발제해야 하는 책(니체의 <도덕의 계보>였던가, 우웩)을 제외하곤 끝까지 읽은 적은 없다. 그래도 1일 1발표를 강제로 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은 파악해 가야했다. 그러다 흥미로운  책을 만났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가 그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소비 사회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는 지금 만큼 미디어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소비 사회를 이미지 사회라고 정의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소비 사회 초입에 서있기에 더 잘 파악할 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비가 만연한 사회에 태어난 우리는 소비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소비 사회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나는 어디선가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 인간은 그 기술로 인한 변화를 더욱 잘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를 읽으면서 그럴 수도 있게다는 생각을 했다. 무질은 소설 앞 부분에서 공중에서 본 도시와 광경을 설명하는데, 나는 그 장면이 2018년 나온 kt의 5G 광고와 닮았다고 느꼈다. 빛이 도시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그 장면을 무질은 1930년대에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것이다. 인류가 AI 초입에 있는 지금, 당신이 느끼는 바를 글로 남겨둔다면 100년 뒤의 인류가 감탄할지도 모른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의 유행과 개성을 정의한다. (내가 이해한대로 적어보자면) 유행은 소비 사회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이미지다. 소비 사회는 대량생산에서 시작됐다. 처음에 새로운 디자인의 바지가 나오면 우리는 갸우뚱 하다가도, 길을 가다가 마주한 광고판과 거실 텔레비전에서 목격한 이미지들을 보면서 새로운 디자인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미지를 추구하기에 광고 속 모습을 따라한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난 결과가 유행이다. 그러나 유행이 소비 사회의 전부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우리 주변에만 해도 유행을 거부하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우리는 이들을 보고 '개성'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개성을 유행에 대한 역류로 보는 게 맞을까?


수업 시간에 '개성'을 갖고 사람들이 활발히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성을 한 사람의 유일무이한 본질의 발현으로 정의했다. 개성은 다른 사람은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인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행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들리야르는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개성이 유행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유행을 살짝 튼 것이 개성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유행하는 청바지에 남들과 다른 벨트를 덧대는 것이 개성이라는 것이다. 나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것이 유행을 살짝 튼 것에 불과하다니, 나와 같이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게 다 교과서에서 배운 인권, 주체성 같은 개념들을 몸에 그대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에, 나는 보드리야르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내가 봤을 때, '주체적 미적 감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미적 가치를 좇을  뿐이다. 스스로 마련한 미적 가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우르르 따라가는 수동적 주체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비 사회 인류의 미적 감각은 대동소이하다. 나는 21살에 당시 유행하던 스키니진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게 어울리는 바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기껏해야 보이프렌드핏이 전부였다. 그때 우리는 펄럭이는 바지를 얼마나 죄악시 여겼던가!) 소비 사회 인간들은 당시에 스키니진을 최고 미적 가치로 여겼고, 이에 호응한 소비 사회는 스키니진 외의 바지는 거의 만들지 않았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없었다.


나는 항상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 미적 가치가 다른 사람들의 미적 가치와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아둔한 닭대가리에 불구하고 나는 주체성을 가진 빼어난 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남들과 다른 것들에 익숙한 닭대가리 중 하나였다. 내가 봤을 때는 엄마의 영향이 컸다. 엄마는 옛날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옛날 영화를 많이 접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흑백으로 된 뮤지컬 영화를 즐겨봤다. 대부분이 1940-50년대가 뮤지컬 영화의 전성기였던 걸로 안다. 한마디로, 나는 올드한 닭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삐쭉거리는 사기컷이 유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단정한 포마드 머리를 좋아했다. 그래서 21세기에 포마드 머리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2015년에 포마드가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새로운 이미지를 빨리 받아들이는 멋쟁이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던 것이어서 2015년까지도 포마드 머리를 싫어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포마드 머리를 할아버지 머리로 봤달까. 본격적인 유행은 2016년도부터 시작했다. 그때즈음에 가르마펌이란 것이 도입된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2016년 12월 가르마펌을 한 공유가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하면서 (미안하지만) 2017년의 닭들은 개나소나 포마드 머리를 하게 됐다.


그리고 히피펌. 히피펌은 2018년부터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16년 1월, 히피펌은 유물처럼 여겨졌다. 나와 같이 90년대생이라면 알겠지만, 부모님의 결혼 사진을 보면 엄마가 흉측한 사자머리를 하고 있다. 80년대에는 나이아가라 파마가 유행하고 있었다. 80년대 미스코리아 머리라고 하면 금방 이해갈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 머리를 하고 싶어했다. 원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고3 때 공부를 하겠다고 내 아이팟터치에 들어있던 영화를 모두 삭제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영화 1편이 남아있었다. 맥 라이언 주연의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그것이었다. 실수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고3 내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반복해서 봤다. 그래서였을까? 맥 라이언의 뽀글뽀글한 긴 머리가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수능이 끝나고 바로 미용실을 갔다. 안타깝게도 당시 유행하던 S컬은 내가 원하던 뽀글이 머리가 아니었다.(대학교 1학년 때, 성당을 열심히 다니던 친구는 내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난 샐리가 되고 싶었던 건데, 당시 유행은 나의 작은 소망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2016년 1월, 독일 교환학생을 가기 전에 이전에 시도해 보지 못한 과감한 머리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면 남의 눈치 볼 일도 없고 마음대로 하고 다녀도 된다는 생각이 나를 추동했다. 첫 번째 미용실에서 사진을 보여줬더니 거절했다. 미용사는 내게 자꾸 물었다. "확실해요?" 나는 3번이나 그렇다고 답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미용사가 확신이 없는 거 같았다. 그 머리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점으로 봤을 때 못생긴 머리였다. 굳이 못난 머리를 하겠다는 고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뽀글이 머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가 없는 미용사에게 내 머리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아는 이모를 통해 미용 경력 40년이 넘는 미용사를 찾아갔다. 온갖 유행을 다 겪어본 베테랑일 터였다. 그러나 베테랑은 처음에 내 요구를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80년대나 하던 흉측한 머리를 왜 하겠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베테랑은 장인정신으로 내 요구를 들어줬고, 나는 5시간 동안 파마를 했다. 그 결과 나는 같이 간 이모 표현에 따르면 영화 <메리다의 숲>에 나오는 메리다가 되었다. 만족스러웠다. 추가로 붉은빛 도는 갈색 머리로 염색도 했다.


나의 뽀글이 머리를 본 사람은 손에 꼽힌다. 중학교 친구와 교환학생을 함께 간 언니들 2명이 다다. 내 머리를 본 중학교 친구의 반응은 예상한대로였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니들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말했던가. "그래. 그렇구나." 나는 2019년도부터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히피펌 영상을 봤다. 댓글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너무 예쁘고, 개성이 넘친다고 했다. 2016년도에 히피펌은 개성이 있다기보다는 이상한 머리였다. 그러나 히피펌의 유행과 함께 히피펌은 개성의 일부로 이해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도 개성은 유행과 관련 없는 주체적 개인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미디어와 유행을 선도하는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파도에 몸을 실고 떠도는 닭들과 다름이 없다.


갈수록 소비 사회에서 군계일학은 힘들어지고 있다. 나는 유튜브 전과 후를 목격한 사람으로서 유행의 속도가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튜브로 인한 이미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전까지 유행의 주기는 내가 봤을 때 10년이었다. 그러나 유튜브가 우리의 일상을 차지한 후 유행은 빠르게 변화했다. 2년, 1년, 6개월로 줄어가더니, 이제는 유행하는 이미지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과거를 향유했던 모든 유행들이 섞여있는 모양새다. 단정한 생머리도 유행하지만, 미친듯이 층을 낸 허쉬컷도 유행 중이고, 자유로우면서 편안한 히피 느낌의 청바지도 유행하지만, 반듯하고 꼿꼿한 느낌의 슬렉스도 유행 중이며, 깔끔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바지도 유행 중이다. 내가 유럽에 있던 2016년 유럽 여자들 사이에서는 연청 스크니진에 검정색 가죽자켓이 유행이었다.(한 명도 빠짐없이 그러고 다녔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2017년즈음에 내 주변 친구들이 갑자기 가죽자켓을 사기 시작하던 때를 기억한다. 유행의 회전 속도가 빨라져서 모든 게 유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아마 볼 수 있는 미디어의 종류와 양이 미친듯이 늘어나서 일 것이다.


나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롱패딩을 입고, 적당히 추우면 숏 패딩을 입는다. 덜 추우면 도깨비의 공유가 입던 길이감 있는 롱코트를 입는다. 그러다 가을이나 봄이 되면 무릎 위에서 떨어지는 오버핏의 히피스러운 코트를 입는다. 2019년까지 나는 내 취향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편이었지만, 2020년을 들어서면서 취향이 옅어졌다고 느꼈다. 확실히 추구하는 느낌이 사라진 것이다. 깔끔함을 추구하다가, 누추함을 추구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다가, 각짐을 추구하고, 유튜브를 보다가 예뻐보이는 건 뭐든 추구한다. 개성이 유행의 변주라는 사실은 여전히 믿지만, 지금은 유행이 너무 다채로워져서 뭐가 유행이고 개성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내가 너무 오랜 시간 취준을 하면서 세상과 동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왠지 모르게 두렵다. 유행조차 모르는 닭 한마리가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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