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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18. 2021

34. 절망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희망적인 척 해 본다

우리 엄마는 별명이 많은 편인데, 대부분이 내가 지어준 것들이다. 그 중 하나가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너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다. 짧게는 '철학자'다. 엄마는 삶의 모든 현상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의하려고 했다. 하나의 작은 현상에서도 교훈을 찾았다. 그런 엄마에 따르면 '삶이란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나는 절망할 때면 엄마에게 물어봤다. 원래 사는 게 이렇게 별로냐고. 그러면 엄마는 인생은 원래 별로이며, 나이들 수록 별로인 일이 많아질 거라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삶은 원래 별로이며, 산다는 건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2020년 12월은 내게 절망의 달이었다. <9. 절망과 광기에 대한 고찰​>이란 글에서 나는 세상과 나의 괴리가 절망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서 절망이 나온다고 정의했었다. 그렇다면 절망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2021년 1월의 절반을 절망에 익숙해진 채 살았다. 나는 거절을 당연하게 여기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내 몸은 내 생각을 못 따라오는 듯 했다. 이상하게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낮에는 하루종일 피곤한 상태였으며, 삶에 대한 의욕이란 것이 생기지 않았다. 모두에게 거절당한다고 가정하는 것, 그래서 철저히 혼자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절망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초등학교 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은 적이 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산다고 결론내렸었다. 나는 어렸지만 비웃었다.(원래 잘 웃는다.) 사람이 어떻게 사랑으로 먹고 산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는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셨지만, 어머니를 살게 하는 건 밥이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짜장면이 아닌 무엇이든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다. 절망을 몰랐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절망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우리가 사랑으로 먹고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불멸할 수 있는 뱀파이어들이다. 영화 속에서 뱀파이어들을 절망하게 만든 것도 죽음이다. 주인공들은 가장 친한 친구가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피를 마시고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절망에 빠진다. 둘은 이미 (일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인) 권태라는 절망에 젖어든 상태여서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며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해가 뜨기 직전에 두 사람 앞으로 어떤 커플이 지나간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결심한 듯이 커플을 잡아먹는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두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서로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살길 택한다.


'사랑하지만,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 절망의 전제라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삶의 전제다. 삶은 이 둘이 충돌하며 지나간 산물일까? 내가 봤을 때는 '삶'이 '절망'을 이겨야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엄마가 절망에 익숙해진 척하지만 절망에 익숙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에게는 이 땅에 사랑하는 것들이 아직 남아있다. 절망을 이겨내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삶에 대한 의지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에서 나온다. 엄마의 별명을 바꿔야 겠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안 그럼 살 수가 없으니."


나는 며칠 전까지 내가 절망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러저럭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또다시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러니까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소화제 광고의 한 장면처럼 나를 짓누르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만으로도 나는 얄팍하게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다고 생각을 금세 바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절망한 상태에서도 사랑할 것을 찾고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매일같이 글을 썼다. 살기 위해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글쓰기가 나를 살리고 있다고 믿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글을 썼기에 그나마 밥을 먹을 수 있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더 이상 절망에 익숙한 척 하지 말아야겠다고 희망적인 척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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