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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4. 2021

7. 짬뽕 아저씨

우리 가족 사이에서 '짬뽕 아저씨'로 통하는 인물이 있다. 아빠 대학 후배인데, 어렸을 때 가끔 우리집을 찾아왔다. 한번은 다같이 중화요리를 먹으러 갔다. 아저씨는 짬뽕을 시켰다. 그리고 짬뽕이 나오지 마자 오로지 짬뽕에만 집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짬뽕에서 눈과 입을 떼지 않았다. 면빨과 아채와 국물이 끊임없이 아저씨 입 속으로 들어갔다.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10분 동안 이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뭔가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한듯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오로지 하나에 집중한다는 것은 진기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짬뽕과 아저씨가 하나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중에 커서 그 순간이 물아일체의 순간이었음을 알게 됐다. 짬뽕 아저씨 이후 나는 그런 물아일체의 순간을 목격한 적이 없다.

내 기억으로 2013-2014년부터 유튜브에서 먹방이 유행이었다. ASMR, 리얼사운드 등 연출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먹방의 테마는 결국 잘 먹는 데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이 먹는 모습을 보고, 남이 먹는 소리를 듣는 것에 어떤 매혹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내가 짬뽕 아저씨를 봤을 때의 경이를 느끼는 것일까? 음식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모습에 감탄하는 것일까? 다이어트를 할 때 뭔가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찾아본 적이 있는데, 내게 그런 경이와 감탄은 없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꺼버렸다. 진정한 먹방을 이미 마주해버린 탓일까도 생각해 본다. 그래도 한 가지는 느꼈다. 특히 엄청 매운 음식을 먹는 먹방 조회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은 것을 보면서, "마비"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아, 나는 마비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다. 기본적으로 마비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영어로는 'paralyze'(패럴라이즈). 'R' 발음에 이어 부드럽게 연결되는 'L' 발음, 그리고 마지막에 마비된 것처럼 지르르하는 듯한 'Z'의 소리. 마비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단어다. 나는 중학생 때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를 듣다가 이 단어를 알게 됐다. 너무 무서운 것을 목격해서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온몸이 마비된 상황을 말하면서 나왔다.  물론 나는 마비의 감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위에 눌린 적이 몇 번 있는데 몸이 마비된다는 것은 끔찍한 감각이었다. 나는 매운 것도 잘 못 먹는 편이어서 조금만 매운 걸 먹어도 혀가 마비되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낀다. 이 또한 반갑지 않으며 공포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비'란 단어는 뭔가 신비롭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를 잃으면서 눈에 띈 단어도 '마비'였다. 소설 앞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화자는 자신의 차를 난폭하게 추월해서 가는 어떤 운전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일상에서는 친절했던 사람들이 왜 차만 타면 돌변할까? 그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과속한다. 화자가 제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동차의 속도가 그의 감각을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운전자는 운전하는 순간에는 오직 속도에만 집중한다. 그 순간에 '나'란 존재도 사라지고 오직 '속도'만 존재하는 것이다. 일명 "속도의 엑스터시"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말로 하면 속도와 물아일체가 되는 순간을 맞이 한 거랄까.


이러한 화자의 고찰은 마셜 맥루한의 이론과도 맞닿아있다. 맥루한은 감각의 확장과 함께 감각의 마비가 찾아온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KTX를 타면 우리는 시속 200km로 이동하고 있지만 이동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찾아온 속도가 인류의 감각을 서서히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에 나오는 미디어 시대의 감각 확장으로 인한 마비에 대한 설명이다. 솔직히 직관적으로 이해는 잘 가지 않는다. 내가 아는 분은 공부를 하면서도 드라마를 틀어놓는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허전하다면서 말이다. 나는 그때 이런 게 시각과 청각의 확장과 함께 찾아온 시청각의 마비인가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눈과 귀를 열어놓으려고 하는 것이 어쩌면 마비의 증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끊임없이 먹방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입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누군가의 입의 움직임을 바라 보고픈 욕구로 치환된 것일까? 우리의 입은 마비된 지 오래여서 입에 대한 끊임없는 시청각적 자극이 필요한 것일까?  미디어 시대의 현대인은 그저 마비에 중독된 것일까? 눈과 귀를 마비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끊임없이 매운 음식으로 혀를 마비시키는 것일가? 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마비의 감각을 둘러둘러 미약하게나마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밀란 쿤데라의 명명을 따라 "마비의 엑스터시"라고 다시 명명해 본다. 우리는 마비의 감각으로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하는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 있어 마비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마비에는 우리에게 주는 생소한 감각이 있다. 다시 짬뽕 아저씨를 떠올려 본다. 나는 그 순간이 멈춰있던 것만 같다고 느꼈다. 마비된 것만 같다고 표현했다. 아저씨의 모든 감각은 짬뽕을 향해 있었다. 나의 감각은 짬뽕과 하나된 아저씨에 있었다. 아저씨와 하나된 짬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가 그때 마주한 건 "짬뽕의 엑스터시"였다. 그 엑스터시의 힘은 주변에 있던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마약의 한 종류이기도 한 '엑스터시'다. 우리는 힘들 때 술을 찾고, 담배를 찾고, 감각을 마비시킬 것들을 찾는다. 나는 슬프고 우울할 때면 생각을 멈추려고 다큐멘터리를 본다. 영상으로 감각들을 마비시켜버리는 것이다. 사실 내겐 글쓰기도 마비의 일부다.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짬뽕과 마비와 속도와 엑스터시와 매운음식, 그리고 다시 감각의 마비까지. 오늘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혼잡한 머릿속을 어질러 놓기만 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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