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지영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다. 원래도 학생들 사이에선 유명한 강사였다. 그러니까 돈을 그렇게 많이 번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돈이 많아서 더 유명해지는 모양새다. 유명해서 돈이 많은 것인지, 돈이 많아서 유명해진 것인지,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우리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으며 논리정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렸을 때는 의지와 실천의 발현을 일직선 상에 놓고 봤다. '하면 된다'는 올곧은 신화를 올곧이 믿고 실천했다. 하지만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의지와 실천은 무작위적이며 연결성이 약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갔다. 그리고 지금은 둘 사이가 멀다가 믿는 편이다. 인생은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한 편의 <농담> 같달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이지영 선생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농담 같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내가 진지한 태도로 삶을 마주하기 어려워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 <500일의 썸머>를 보고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사랑은 꼭 그 사람일 필요가 없는 우연을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운명으로 바꾸는 것." 여기서 사랑은 우리가 인생에서 하는 모든 선택으로 치환될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한 현재를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만약 아무런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나의 모든 것은 우연이 되고, 그 무게는 가벼워진다. 의미없는 선택에 기댄 우연한 현상들이 내 앞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지영 선생님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우연 그 자체여서 한마디로 요약하기 힘들다. 그냥 우연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6월 모의고사가 끝나고 생활과 윤리를 시작했다. 원래는 한국지리를 선택했었다. 한국지리를 선택한 이유는 2가지였다. 첫째로, 학교에서 수업을 듣기 때문에 중간, 기말을 치뤄 준비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둘째는, 나와 유머 코드가 맞는 친구가 한국지리 인터넷 강의(인강)을 적극 추천했다. 이 2가지 이유가 힘을 합쳐 한국지리 과목 선택을 추동했다. 정확히 따지고 보면, 2번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 나는 고3이었고, 지겨웠고, 웃음이 필요했다. 6월 모의고사에서 한국지리를 망치고 깨달았다. 한국지리랑 안 맞고, 무엇보다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라고 여기던 것을 내가 어찌나 가벼운 마음으로 처리해 버렸는 지를 말이다. 자책감보다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국지리를 선택한 이유는 웃기다는 인강 때문이었고, 친구가 내게 보여준 인강은 밭규(지도상 밭의 기호가 손가락 욕과 모양일 닮았다고 설명하던 것으로 기억한다)였다. 수능을 5개월 정도 앞두고 밭규(?)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만만한 과목을 골랐다. 망설일 것 없이 생활과 윤리였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윤리 과목을 배웠다. 윤리와 사상하고 생활과 윤리가 그것이다. 윤리와 사상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엄청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조근조근 말했지만 내가 너의 우위에 있으며 너를 짓누르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듯한 포스가 우리를 움츠려들게 만들었다. 생활과 윤리 선생님은 이와 정반대였다. 내가 아는 교사 중에 가장 친절하고 발랄했다. 수업 중에 방방 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방방 뛴 사람을 구경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용적으로는 윤리와 사상을 더 좋아했지만, 분위기로는 생활과 윤리를 더 좋아했다. 사실 추가로 배우는 게 없어서 좋았다.(내가 기억하기로 생활과 윤리는 시험 보기에 적합한 과목이 아니다. 많이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기를 요하며 만들어진 과목인 것 같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수업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분위기가 내가 생활과 윤리를 선택한 이유였다.
생활과 윤리를 선택하고 이지영 선생님 인강을 들었다. 수능까지 기간도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생활과 윤리에 돈과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열심히 안 해도 점수가 잘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수능이란 것이 그렇다. 불안한 마음을 추궁한다. 안 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는 수험생의 의식을 경건히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ebs에서 무료 인강을 듣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지영 선생님 강의는 졸렸다. 많이 졸렸다. 목소리가 너무 나긋나긋했다. 며칠 듣고 못 듣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스카이에듀에서(당시 여기서 국어 인강을 듣고 있었다. 이것도 강사가 재밌어서 선택했다. 썰을 잘 풀었다.) 이지영 선생님을 발견했다. 무료 강의와 유료 강의를 동시에 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사람들은 보통 무료 강의를 들으려고 하니까. 뭔가 다를게 있을까 싶어서 맛보기 강의를 들어봤다. 감상평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기(?)'가 적당할 것 같다. 목소리 톤과 크기부터 달랐다. 본인 말로는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이 카메라 앞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힘이 난다고 했다. ebs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며 강의를 결제했다. 미디어 시대는 뭐든 재밌어야 통하는 법이다.
우연의 우연에 의한 우연한 강의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위로가 됐다. 6평 이후 나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철저히 혼자가 됐다. 당시에 대해 짧게 말해 보자면, 혼자되는 것은 비참한 편에 속한다. 나는 내가 친구들에게 학교 생활 동안 상당한 위로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눈물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지는 몰랐다. 비참한 상태의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이지영 선생님의 강의였다. 카메라 너머로 내 상황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어쨌든 당시에는 위로가 됐고, 그래서 의존했다. 의존하다보니 자꾸 이야기를 갖다 붙이게 됐다. 우연히 듣게 된 강의일 뿐인데, 하늘이 내게 보내준 운명 같은 위로라고. 우습지만 이 생각자체가 위로가 됐다. 그렇게 고3을 무사히 보냈다.
그때 이후로 나의 가치관은 어느 정도 정해진 것 같다. 나는 무언가 선택을 할 때 크게 의미 부여하려 하지 않는 편이다. 그냥 그 당시에 끌리는대로 행동한다. 당시에 주어진 정보 안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그 이상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택의 의미는 어차피 나중에 붙여진다. 최대한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선택하고 진지하게 선택을 되돌아 본다. 역사가들이 역사 속의 인물을 바라보 듯이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게 나만의 믿음의 체계를 만든다. 동시에 그 만들어진 믿음의 체계를 스스로 최대한 믿지 않으려고 한다. 무언갈 믿기엔 세상은 너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기에. 믿지 않는 것, 그게 나를 정의하는 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판단을 최대한 유보하는 것, 내가 지금도 하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지영 선생님이 하는 확신에 찬 조언들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가 이지영 선생님을 통해 배운 나만의 믿음 체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