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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Sep 11. 2023

바람, 바람, 바람

잊을 수 없는 3.1절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모자를 쓴 채 다닐 수 없다. 모자 창을 붙잡고 어정걸음 하느니 차라리 벗는 게 좋을 듯싶은 날씨다.

 오늘의 일기를 말해주듯 길가에 세워 둔 주차금지판은 그 안에 모래나 물을 채워 바람에 견디도록 하였거늘 강풍을 이겨내지 못한다. 

음식물 분리통마저 내용물이 들어 있지 않더라도 그 무게가 상당한데 그것도 바람의 밥이 된다. 초소 출입 방화문도 바람의 힘을 견디기 어려운 듯 덜그럭거린다.


 더 희한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아파트 출입 차량 관리를 위해 게이트에 입. 출입 차단 장치를 설치했는데 바람의 힘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차량 출입 차단 바가 서서히 뜨기 시작한다. 들썩들썩, 휘청 휘청, 시간이 갈수록 그 높이를 더해간다.  

 씨름꾼이 들배지기 기술 등을 이용해 상대방을 힘껏 들어 올려 내동댕이치듯 바람은 차단 바를 서서히 들어 올다. 차단 바가 들리자 바람은 재미를 느끼는 듯 바람의 세기를 더한다. 마침내 차단 바는 바람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수직으로 치솟아 내려오지 못한다.  차단 바의 너비가 10여 cm로 바람을 받아내는 표면적이 적도 바람은 사정없이 차단 바를 갈긴다. 차단 바에 입주민 출입 전용이라고 쓴 헝겊을 매달아 헝겊 표면에 바람이 달라붙어 점점 그 강도를 더해 들렸겠지만, 그래도 그렀지 바람에 의해 차단 바가 치켜 올라갔다면 누가 믿겠는가.

 차단 바 강한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살려달라는 듯 공중에서 바동댄다. 바람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르르 떤다. 더는 그 장면을 지켜보지 못 차단 장치를 수동 조작한다. 그런데도 차단 바는 꿈쩍하지 않는다.

 경비원의 신세도 바람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공중에서 르르 떠는 차단 바와 별다르지 않다. 바람의 세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차단 바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허공에서 바둥대듯 관리자의 채찍이 강하면 강할수록 경비원의 신세 또한 고달파진다.

 바람이 사업자라면 바람의 저항을 이겨내고 제자리를 찾고자 몸부림치는 차단 바는 근로자인 경비원이다. 관리자의 태도나 경비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변화가 없으면 경비원은 설 자리가 없다. 바람에 날려 공중을 부유하는 차단 바처럼 경비원은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말 못 하고 쓰러지거나 유서를 남기고 죽음으로 생을 끝낼 수밖에 없다.

 이곳 아파트는 넓기도 넓다. 2500여 세대가 모여 사는 대규모 단지라 역을 나눠 분양해도 좋으련만, 그 넓은 구역을 구획하지 않고 한 번에 통째로 분양했다. 조합원 아파트여서 그리 했는지 모르지만, 경비원의 처지에서는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근무하면서 느낀 건데 처음 아파트를 세울 때 단 층의 지하 주차장을 2개로 만들었으면 했다. 지하주차장이 좁아 안달복달하느니 한 집 당 500씩만 더 내면 지하주차장을 넓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 했다면 입주민이나 보안대원들이 주차로 인한 불편은 확실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더 살기 좋은 아파트가 되어 너도 나도 이사 오는 명품 아파트로 탄생되었을 법 한데 그리 하지 않아 아쉽기는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비 업무 초소를 두 개를  두고 있다. 아파트 동을 나눠  차량 관리, 순찰,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다. 후문에 근무해 보니 대원 1명이 더 많은 정문보다 근무 여건이 나쁜 편이다. 민원 발생에 따른 출동을 위해 추가로 1명을 정문에 배치했어도 민원 발생이 밥 먹듯 빈번하지 않다. 어쨌거나 내가 관할하는 후문 초소는 업무 양도 많고 관할 구역도 넓은 편이다. 주어지는 휴게시간 외에 나름의 쉼 시간을 만들어 쓰고 있어도 그 또한 적지 않은 요령을 피워야 할 정도로 하루 근무가 빡빡하다.

 그런 여건도 나를 힘들게 하는데 오늘처럼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후문 근무자는 더 긴장한다. 후문 관할지역 일부엔 골바람이 분다.  맘스스테이션이라고 어린이집이나 돌봄 유치원 통학 버스가  머물다 가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단지 어느 곳보다 바람이 세게 분다.

 한 겨울인 12월, 업무를 배워가며 맘스스테이션에서 근무하던 날, 그날따라 바람이 매서웠다. 단단히 차려입고 교통 안내를 하는데 어깻죽지가 시려 혼이 났다. 내피까지 입고 귀마개와 방한 장갑에 턱시도까지 했건만 바람은 옷 속으로, 옷 속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바람이 덜 부는 곳보다 체감 온도가 2-3도 차이가 날 정도다. 그런 고충을 정문 근무자에게 말해도 고지를 듣지 않는다. 나는 그곳을 시베리아 벌판 또는 북한에 있는 개마공원이라고 부른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통하는 골바람이 는 곳, 그곳에서 대원들은 바람과 싸워 가며 근무한다. 



그런 혹한의 겨울을 보내고 계절은 새싹 움트는 3월이다. 3월 근무 첫날, 나는 삼일절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나라 독립을 외치며 돌아가신 유관순 열사 등 독립투사를 기리는 날 외에도 태극기가 바람에 날려 화단에 수직으로 내려 꽂혀 있는 장면을 보고 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의 드문 사건이라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다.

 아파트 최고층은 29층이다. 높이를 따지면 60여 m 정도 되는 시설물이 높기도 높다. 어느 집, 어느 높이에 걸렸던 건지 모르겠으나 태극기떨어져 화단에 수직으로 꽂혀 있다. 사람이 태극기를 땅에 꽂아놓듯 펄럭거리고 있다. 웬만한 바람이면 태극기가 떨어지더라도 널브러져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 설령 똑바로 꽂혀 있더라도 재차 불면 쓰러져 있었을 텐데 다. 삼일절을 기리듯 오랜 시간 그런 모양으로 펄럭이고 있다.


그런 장면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초등학생이 초소를 찾았다. 아파트 주변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인 찾아 달라며 주워 오고, 초소 옆 동 벚나무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고 했다.

 현장에 가보니 어느 집에서 떨어진 건지 모르나 태극기가 연처럼 나붓대고 있다. 그곳에는 구경거리를 만난 듯 초등학생 한 명이 더 있다. 나는 주변에 있는 나무를 고정하는 수목 지지대가 있기에 그것으로 태극기를 내려보려 했다. 그럼에도 태극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주면 줄수록 더 친친 감겼다.

 아이들은 재촉하는데 내 능력 한계를 드러낼 수 없다. 긴 바지랑대를 어디서 구해 까? 아니다. 아직 나는 젊다. 어렸을 적부터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 먹은 적도 있고, 새집에 있는 알을 꺼내려고 덩치가 큰 나무를 타고 오르기도 했던 시골 놈이 아니던가.

 손에 침을 퉤 뱉고는 아이들에게 아저씨가 나무 타는 거 봐라. 다람쥐 같을 거야 하고는 굵은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다리에 힘을 주며 나무 둥치를 탔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나이 60이 넘어도 내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는 게 뿌듯했다. 아니, 고마웠다. 맘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몸, 나이가 거꾸로 먹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나뭇가지에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태극기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태극기를 걷어 윤진이라는 학생에게 건넸다. 윤진이는 내가 태극기를 내려준 걸 받더니 신이 났는지 아파트 주변을 더 돌아다녔나 보다. 친구 하나 붙들고 여기저기서 태극기를 주웠다며 초소로 몇 개를 더 가져왔다. 저녁밥시간도 됐고 해서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아이는 괘념치 않고 경비원이 해야 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윤진이와 친구가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윤진이는 장래 희망이 프로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다. 형이 있어도 형보다 체격 좋고 키도 큰 건, 평소에도 공을 갖고 놀고, 줄넘기를 하며 태권도 학원에 다닌 덕이라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후에도 나는 윤진이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봄에 피는 꽃을 알려줬다. 축구 선수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축구 클럽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렇게 관심을 보이니, 윤진이 또한 보안실을 지날 때마다 내게 인사를 하고 안부도 묻곤 한다. 어느 더운 여름날엔 아빠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 바를 건네는 아이로 성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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