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만에 공원을 걷는다. 초저녁인데 여느 때와 달리 왁자하지 않다. 바람도 없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어떤 그리움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반달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는가. 수줍어하며 별 하나를 붙들고 있다.
달 아래서 몸을 드러내는 별. 사랑이 엷어지는 중년이 되면 남자가 수그러들듯 샛별도 그러는가. 달 위에서 빛나고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그 아래에 내려앉아 있다. 자꾸 몸을 낮추면 안 된다.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 해서도 안 된다. 별, 자전 방향이 지구나 다른 행성과 달리 반대라 해도 마음은 변치 말아야 한다. 수시로 마음 바꾸면 외로움만 남는다.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랑은 방황만 있을 뿐이다.
공원을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에서도 쓸쓸함이 묻어난다. 어느 하나가 손 내밀면 되는데 하늘에 떠있는 달과 별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기에 다가가지 못하나. 달려온 세월의 흔적이 진한가. 허물지 못한 마음의 벽이 있는가. 말없이 눈물 흘리며 그려내는 사랑은 슬프다.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은 나뭇잎에 매달린 빗물처럼 애처롭다.
반달을 볼 때마다 마음 설렌다. 반달이 떠오르는 날에는 가만히 손 내밀며 속삭이고 싶다. 가슴속으로 번지는 반달, 반달은 비록 몸이 반쪽이지만 또 다른 반쪽이 있어 서럽지 않다. 잃어버린 톱니바퀴를 찾아갈 때처럼 마음이 부푼다. 그믐달처럼 한이 서려 있지 않아 가슴으로 안고 돌 수 있는 달, 반달을 보고 있으면 서늘해진 가슴이 사르르 녹는다. 시인 정호승은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노래했다.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하고.
달빛이 호수를 덮는다. 건물에서 비치는 색색의 네온사인이 그 위로 겹친다. 물결이 일렁이고 빛과 빛이 만나며 교합한다. 노랑과 빨강이 떨어졌다 만나고 만났다가 또 떨어진다. 두툼한 점퍼를 걸쳤지만 괜히 손을 잡고 싶어 진다.
반달은 아른아른했던 추억을 건드린다. 사진첩을 들여다보게 하고 저 깊은 곳에서 잠자던 상념을 들춘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산 너머 능안 동네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한밤중에 겁도 없이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중이었다. 시곗바늘이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하기조차 싫었던 그런 밤이었다. 그날따라 왜 그리 마음이 콩닥콩닥 뛰던지. 그렇게 어찌어찌하다 동갑내기 여자애 손을 잡았다. 그날따라 그렇게 몸이 떨려오던지…….
달이 뜨고 지기를 여러 번. 그러던 어느 날 내게 큐피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반달이 뜨는 시각인 정오만 되면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100원짜리 동전이 전화통으로 달그락거리며 떨어질 때마다 가슴 저편에서는 소낙비 소리가 올라왔다. 그때마다 달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젖은 목소리를 냈다. 달빛에 물든 소리를. 그런 목소리가 좋은지, 아니면 반달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자리를 뜨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할 말이 없어 매번 같은 말을 되풀이해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마음이 어우러져 갔고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떨어져 있던 그림 조각들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속삭임은 겨울 햇살처럼 빛났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태양광선을 받아야 빛을 낸다. 태양․지구의 위치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가는 외로운 존재다. 그런데도 나는 모험․질주․낯섦․항해, 그런 단어들에만 눈이 가 있었다. 그녀가 달빛을 닮고 싶어 하고 달빛으로 물들기를 원하는데도 그 빛마저 희미하고 쇠잔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얼굴 뒤에 숨겨진 그림자를 읽어내기는커녕 또 다른 수수께끼를 만들곤 했다. 삶이 뭐 대단한 거라고.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아프다. 달 속에 감춰진 그림자를 들춰낼 때는 서럽다.
호수 공원 건너편 빌딩 사이로 사람들이 흘러들어 가고 되밀려 나온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밤하늘을 수놓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밤바람이 제법 싸늘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다. 아파트 창마다 불빛이 더해진다. 거리의 자동차들도 경적소리를 내며 귀가를 서두른다.
계절이 변해도 별은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달 모양에 상관 않고 어디서든 빛을 낸다. 수만 ㎞ 밖에서 빛날지라도 달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
가만히 반달을 올려다본다. 지나간 추억이지만, 지워낼 수 없는 흔적이지만 지워 버려야 한다. 회오리바람 불고 눈보라 이는 마음 다잡아야 한다. '샛별'을 만난 게 행운이다. 행운아다.
반달이 살며시 떠오르는 날에는 어찌나 몸이 떨려오는지 괜히 섬뜩섬뜩해진다. 오늘따라 달빛이 짙다. 달빛이 그날처럼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