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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Sep 29. 2023

울음 꽃

수필에 날개를 달다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울음보가 터진 지. 답답한 일이다. 어찌하여 그토록 크게 소리 내어 우는지 그 연유가 궁금해 아들에게 물어도 고개만 내저을 뿐이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분유를 타 주며 아들보다 더 품어주고 안아주는 며느리에게서조차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두려움이 앞서는가, 어미의 품이 그리운가. 노여워하는 모습이 딱하기만 하다. 더 따스한 손길과 눈빛으로 둥개둥개 얼러도 소용이 없다. 하여 아이의 눈길에서 벗어나 본다. 웬만하면 그치겠지 해도 그칠 줄 모른다. 숨 가쁘면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운다.  

  아들 내외가 모처럼 만에 여행을 떠난다는 날이다. 출산 후 꼼짝하지 못하다 우리 내외에게 손주를 돌보게 하고 거제도로 2박 3일 바람을 쐬고 싶다기에 올라왔다. 그런데 다온이는 제 어미 아빠의 속내도 모르고 운다. 엄마 품을 떠나는 게 쉽지 않은가. 어떤 불만으로 끌탕을 치는지 그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울음 우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들 얼굴빛도 달라진다. 그리 보채다가 설령 평온을 되찾는다 해도 자식을 놔두고 여행하는 게 편치 않은지 여행 가지 말까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기조차 무안하다.

  우리 내외를 보자마자 처음부터 보채던 건 아니었다. 집에 도착해 얼굴 마주하고 말을 건네며 인사를 나누기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가움의 표시로 방싯 웃던 교감의 시간도 있어서 이참에 좀 더 친해지려고 했던 마음이 지나쳤나? 바투 다가가 나직이 말을 거는 그때부터 당황스러워하며 앙칼지게 울기 시작했다. 뭐에 놀란 애처럼. 아내가 붉은색의 셔츠를 입어 그 경계심에 그러는가 싶어 다른 옷으로 바꿔 입어도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 엄마가 안아주고 업어줘도 생떼는 여전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말도 따스한 온기로 품어도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도 밝고 해맑았던 미소를 언제 보여줬는지 싶다.

  손주를 보러 수원으로 올라간 게 백일 날 포함해 여러 번이다. 한 달에 한 번꼴은 본 셈이다. 한 달 전 백일잔치 날에는 오늘 같은 우려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볼 적마다 제 아빠 엄마 대하듯 까르르 웃으며 미소를 팍팍 날려주지 않았던가. 평시 웃고 지내는 날 별로 없어도 손주를 보러 오는 날만큼은 나 또한 신이 났다. 업어주고 안아주며 정 붙이는 그런 날이면 소풍 가는 어린애가 되었다. 그런 천진무구한 웃음이 있기에 오늘도 차를 몰고 올라오는 도로 위에서의 짜증이나 피로는 괘념치 않았다.  

  처음 얻은 손주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톡으로 보내오는 모습은 신기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손주 생각이 날 때면 보내온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또 보며 만날 시간만을 학수고대한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노는 사진이나 영상을 블로그에 올리고, 내 방에 찾아와 댓글 남겨주는 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가질 정도로, 손주를 향한 마음은 그리움을 넘어 낮이나 밤이나 마음을 술렁거리게 한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반기기는커녕 울음보를 턱 하니 꺼내놓는다. 그것도 한 보따리씩이나. 엄마 아빠와 잠시라도 떨어져 못 살겠다는 듯 심술까지 부린다. 손주와 마주한 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도 서먹함은 가시지 않는다. 떫은 감을 씹고 나면 그 쌉싸래한 맛의 여운이 오래 남는 것처럼 다온이는 좀체 다가오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태양처럼 귀한 존재로 여겼건만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아이를 향한 사랑스러운 마음이 약간은 식어간다. 떫은 감을 씹을 때처럼 내 얼굴빛도 변해 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랑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내주며 둥지를 트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참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도 필요에 따라 색깔을 달리한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시간에 있다가도 제 필요를 채우지 못하면 서먹해진다. 어쩌면 사랑도 물건을 고를 때처럼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 따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원하면 다가가고, 필요치 않으면 냉정하게 등 돌리는.

  시곗바늘이 오후 두 시 가까이에 닿아 있다. 그렇게 칭얼거리고 떼를 쓰며 노여워하더니 기분이 좀 가라앉았는지 다온이가 울음을 그친다. 장난감 자동차를 태워주고 분유를 입에 갖다 대줘도 싫은 기색이 없다. 적대시하던 행동을 접고 웃는다. 분유를 먹으며 통을 잡은 내 손에 제 손을 올리는가 하면, 검지를 쥐기도 한다. 아들 내외의 근심 어린 얼굴빛도 차츰 밝아진다.

  울어 봐서 알지만 한바탕 소리 내어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거칠었던 생각과 잡다한 상념도 말갛게 비워주기에 가슴속이 한결 후련해진다. 그러고 보면 울음도 꽃이다. 나무나 식물이 언 땅에서 모진 바람을 견디고 나서 꽃을 피운다. 다온이도 이런저런 일로 울고 나면 한 폄은 더 자라 있을 것이다. 꽃이 피면 벌이 찾아들고 나비가 날아들듯 다온이도 엄마 아빠의 손짓과 눈빛을 머금으며 더 넓은 세상에서 아름답게 꽃을 피울 것이다.

  안아주고 업어주다 유모차를 태운다. 그것마저 싫증을 내면 보행기를 태우고 동요를 들려준다. 아이의 몸을 사각 지지대에 달린 끈에 의지하게 하고 물이 담긴 튜브를 발로 차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노는 기구가 있는데, 그것을 태워주니 하늘을 날며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기분을 낸다. 신이 나 함박웃음을 짓고 옹알이까지 한다. 그렇게 십여 분 이상을 놀아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나도 아들 내외가 그리했던 것처럼 손주와 함께하는 과정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아 띄운다.

  아들 내외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다음 날 가족 대화방에 동영상 두 편이 올라왔다. 다온이가 이유식 하는 모습이다. 찹쌀이나 멥쌀에 당근을 갈아 넣고 끓였는지 작디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에 담긴 불그스레한 것을 받아먹기도 하고 빨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런 모습이 대견해 몇 마디 거들었는데 며느리가 답글을 올린다.

  전날 우리 내외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다온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보채며 징징 울었다고 했다. 배가 고파 그러거나 잠투정하거나 기저귀 갈아줘야 하는 그 어떤 징후도 없었는데 한참 동안 울었다고 했다. 그냥 한참 동안을.


< 충북수필문학, 2021.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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