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없거나 부족한 것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다면 삶이 전보다 달라져 있을까? 그 꿈이 무모해 얼굴 빨개지는 걸 알면서도 엉뚱한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룡능선은 내게 그런 대상 중의 하나다. 산을 생각하면 설악산을 떠올리고, 설악산 하면 공룡능선을 머릿속에서 그린다. 거리를 걷다가 아는 사람이거나 목소리가 연인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단숨에 달려가듯, 산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공룡능선을 이야기하곤 한다.
대청봉을 밟아 보았던 게 언제던가. 1998년 10월 전국도서관대회가 강릉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열린다고 해 대회가 끝나는 금요일 오후에 일행들과 설악산에 올랐다. 설악동에서 산행하여 천불동 계곡을 지나 대청봉을 넘었다. 그렇게 1박 2일로 봉우리를 넘었지만, 그때는 경험도 없는 무모한 산행이었다. 산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일행을 따라갔다고나 할까. 설악산에 대한 동경 하나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폭산장에서 묵는 첫날부터 고생의 연속이었다. 추위를 걱정해야 했고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해 배를 쫄쫄 곯아야 했다. 깊은 산속에서는 해가 일찍 넘어가기에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나무 졸가리를 꺾고 삭정이를 주워 군불을 땠다. 산장에 가면 음식을 사서 먹을 수 있겠지 하여 그냥 가다시피 했는데, 산장 주인은 내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할 수 없어 라면을 끓여 배고픔을 달래고 라면 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부어댔다. 말이 산장이지 방이 비좁고 천장 높이도 1m 30cm 정도로 낮아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시피 했다.
만나지 못하면 속병이 생긴다든가. 낙엽을 밟을 때면 자박자박 올라오는 저음에 매료되듯 가을이 되면 설악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공룡능선에 오르지 못하고 비켜 갈 때의 아쉬움은 말도 못 했다. 공룡에 대한 아련함, 얼마 전 설악산에 다녀왔어도 일반 여행객이 많은 설악동에서 비선대 쪽으로 산행 계획을 짜는 바람에 공룡능선 근처에는 가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공룡의 등뼈를 닮아 이름 붙여진 능선의 기암괴석을 밟지 못하고 돌아설 때의 안타까움은 첫사랑의 대상처럼 그리움으로 번졌다. 저 멀리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듯 공룡능선을 바라보며 또 비틀거려야 했다.
6월 어느 날 밤 열한 시, 전세 버스에 몸을 싣는다. 야간 산행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몰려왔지만 공룡능선에 펼쳐진 비경을 볼 수 있다는 설렘에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열두 시간이 넘는 산행을 하려면 억지라도 잠을 청해야 하는데 임을 만날 때처럼 설렌다. 새벽 두 시경에 산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한계령 근처 어느 허름한 식당에 이르자, 밤참 겸 아침을 된장국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한 시간여 뒤, 남들 깨지 않은 시각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계곡에서 헤드 랜턴의 불을 밝힌다. 지난날의 시간이 '밥'과 관계된 것이든, 사람과의 ‘인연’으로 인해 얽힌 것이든 저만치 밀어 두고 어둠의 공간에서 고독을 풀어낼 대상을 찾는다.
삶을 뒤돌아보면 좋고 나쁜 일이 반복되듯 보이지 않는 어둠에도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돌부리가 나타나면 조심하고 웅덩이에 빠지면 받아들인다. 어둠을 걷어내며 대청봉으로 향한다.
야간 산행은 경험의 여부를 떠나 두려움이 앞선다. 어둠이 주는 막막함 때문에 그렇고, 경험해 보지 않는 불안감 때문에 더 그렇다. 군대에서 야간에 극기 훈련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젊었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나이 오십하고도 중간을 넘어서고 있다. 뒤처져 걷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고, 체력을 소진해 남의 등을 빌려야 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조심하며 발걸음을 뗀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잘 생기든 그렇지 않든, 산객들은 그런 것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오롯이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자기 길을 간다. 본의 아니게 빛이 들지 않은 터널에 갇히기도 하고, 어둠의 공간으로 도피하던 때가 있다고 해도 그런 시간에서 벗어난다. 1.5V 건전지 두 개로 불을 밝히는 헤드 랜턴에 몸을 맡긴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어둠을 가르며 산에 오르는 사람들, 남에게 말 못 하고 가슴속에 쌓아 둔 이야기를 풀어내며 설악으로 향하는 산객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발걸음을 내디딘다. 어두운 길을 어떻게 걸을까, 야간 산행이 두렵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벗어난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풀어낸다. 주변 의식하지 않고 어둠을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내버려 두고 나는 나대로 발걸음 옮긴다. 어둠을 헤쳐 가며 바람이 전하는 말을 되새기고 숲에서 번지는 향을 맡는다. 잠시 앉아 쉬는 동안에는 땀의 의미를 생각하며 몸이 주는 신호를 받아들인다.
대청봉의 비경에서 빠져나온 일행은 희운각에서 명암이 엇갈린다. 산 대장은 오후 3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악동 주차장에 도착하여야 한다며 산행 초보로 보이는 사람들을 희운각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가라고 돌려세운다. 공룡을 동경한 세월이 얼마던가. 임을 보기 위해 바닥난 체력을 되돌리려 한 시간 또 얼마던가.
공룡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낸다. 때 묻지 않은 화선지에 난을 치듯 산 아래 펼쳐진 비경을 붓질한다. 묵언수행 하듯 정제된 마음으로 공룡을 품는다. 계곡 아래로 펼쳐진 비경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며 나 자신을 응원한다. 곳곳의 기암괴석과 비경을 사진에 담고 감상에 젖으며 두 팔 벌릴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어둠의 시간을 헤치고 솟아난 태양이기에 눈이 부시다. 누가 이런 곳에 천혜의 조각 작품을 남길 것이며,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붓질할 수 있을까! 가파른 경사면이 수없이 나타나고 밧줄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위험지대가 곳곳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지만 공룡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를 향해 손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