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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19. 2023

386의 시간 속으로

                    

 우리 일행이 ‘쉘부르’에 가기 위해 그곳을 찾은 시간은 저녁 8시가 조금 넘어서다. 밤낮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나고 상점에서는 형형색색의 불빛을 내뿜는다. 자동차의 굉음도 만만치 않다.

 이 지역은 2000년을 기점으로 도시 개발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신흥 개발지로 다른 지역보다 도시의 움직임과 변화가 놀랍다. 남북으로 가로지른 6차선 도로를 경계로 한쪽은 주택 지역, 다른 한쪽은 유흥 지역으로 나누어진 청주에서 제일가는 상권(商圈)이다. 한동안 이 지역을 찾지 않거나 무관심하면 목적지를 물어서 가거나 아는 사람을 동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에서 헤매기 일쑤고 도시 촌놈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루 저녁 자고 나면 건물이 하나둘씩 들어설 정도로 도시의 발전은 초를 다툰다.

  ‘쉘브르’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가득하다. 테이블 한쪽에선 80년대 추억을 되새기려는 듯 잔을 홀짝홀짝거린다. 생일을 맞은 사람들이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터뜨려가며 한바탕 논다.

 천장에 원형의 샹들리에가 온갖 색을 뿜어대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벽에는 나그네가 저녁노을이 물든 시간에 검은 외투와 모자를 푹 눌러쓴 차림으로 담에 기대 궐련을 물고 서 있는 사진과 음악가가 희미한 불빛 아래서 색소폰을 불고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대조를 이룬다. 천장 거꾸로 매달린 하얀 우산, 이국적으로 다가온다. 프랑스 노르망디 항구도시 쉘브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쉘브르의 우산’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쉘브르 우산 가게의 딸 쥬느비에브는 같은 마을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는 기이와 사랑을 나누며 장래를 약속한다. 그러다 기이가 군대에 가 소식이 멀어지자, 보석상 주인 로랑카사르와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한다. 하지만 가난에 쫓겨 결혼을 한 거라 사랑에 괴로워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나중에 주유소에서 옛사랑을 만나지만 뒷모습만 바라보며 떠나는 이에게 손 한번 내밀지 못한다.

슬프면서도 운명적인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 

그 분위기와 주제에 맞게 무대에선 무명 가수가 80년대의 노래를 부른다.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가끔가다 열기를 모으고 흥을 돋으려고 김종찬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섞는다. 일행들은 음악에 젖어 몸을 들썩들썩한다. 박수를 치며 흥얼거리고 리듬에 따라 발바닥을 구른다.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려 가면서 옛 시절로 초침을 돌려놓는다. 요즘 유행하는 힙합이나 헤비메탈의 빠르고 경쾌한 리듬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이상의 여흥을 즐다. 넓지 않은 홀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음악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가 고조된다. 지난 시절의 그리움을 삭이려는 듯 연인들이 홀로 계속 밀려든다. 빈 좌석이 없어 서거나 벽에 기댄 채 축제에 동참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우리 일행들은 자리를 좁혀가며 그들에게 1인용 의자를 내어준다. 좁게 앉아 불편을 느끼더라도 호흡은 넓어진다.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행복!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우리들만의 기쁨.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밤

창가엔 별이 찾아와 밤을 밝히고

쉘브르엔 알싸한 생맥주의 향이 녹아내려

젊은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

우리는 벌써 하나가 되었습니다.

열정의 몸짓으로 밤을 사르고

통기타의 공명으로 우주를 여는

 당신의 정열적인 노래에 흠뻑 취해보고 싶습니다.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에게 쪽지를 전했다. 사랑의 메시지를 받아주세요. 오늘 밤 나는 무척 행복하답니다. 여기에 모인 연인들 모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행복입니까.

 금방 회답이 왔다. 나름대로 맛을 가미해 김창완의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기타 줄에서도 힘이 넘쳐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중략)

 생각나면 들러 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중략)


 이 노래는 80년대 학창 시절의 필름이다. 10. 26. 사태 이후 혼란기를 겪은 우리 현실은 힘을 가진 자의 논리에 밀려가야 할 길을 못 가고 정의가 살아나지 않은 상태에서 굴절되어야 했다. 젊은이들은 힘이 있어도 힘을 쓰지 못하고 80년대를 그냥 흘려보내야 했다. 남남도 아닌 젊은이들끼리 서로 편을 나눠 총칼을 들이대며 피를 나누고, 최루탄 가스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발버둥 쳐야만 했다. 바깥세상이 무서워 어두운 곳에서 격동기의 삶을 살았던  학창 시절은 반 토막이 나서 군대로 피신하지 않으면 내 몸 어찌할지 몰라 혼란에 빠질 것만 같았다. 밖에 나가면 최루탄 냄새뿐이고 사람들은 언제나 쫓기는 듯 불안해했다. 거리는 한산했으며 온갖 방송 매체의 뉴스는 어두운 그림자뿐이었다. 이래저래 술로 세월을 어루만지고 불빛 흐린 지하 다방에 숨어들어 어둡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회색 도시의 콘크리트 벽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삶 살았던 나. 암울한 세상의 흐릿한 잔상들로 밤잠을 설쳤던 지난날에 대한 서러움과 혼돈의 물결. 다시는 오지 않아야 할 지난날의 슬픔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맘 한구석이 여전히 뻥 뚫린 것 같은 허전함에 가슴이 비어 다.

 음악이 바뀐다. 잠시나마 답답하였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듯 무대에서 빠른 템포의 음악이 흐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노랫가락에 몸을 맡다. 젊음의 무대에 동참한다. 맑은 물이 골짜기를 흘러내리듯 풋풋한 향기가 밤하늘을 밝힌다. 별빛이 묻은 젊었을 때의 추억이 창가에서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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