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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19. 2023

난초

 그녀가 다가온 시간은 풀잎의 물기가 마르기도 전인 이른 아침이다. 햇살이 어둠을 걷어내고 간신히 창가에 다다를 즈음, 나는 다가올 미래를 동경하여행의 환상에 빠지기도 하며, 글이 그리워 하얗게 밤을 지새운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안개꽃 내음과 붉은 장미향이 배어난다. 머무는 공간이 향기로 가득 찬다. 어둠을 가셔 내는 촛불가, 그녀의 자태 아름답고 황홀해 슬픔으로 승화한다.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그녀만큼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이 있을까. 그녀의 향에 견줄만한 것 어디에도 없으리라! 남들이 들으면  나이 되도록 어찌 그런 날이 없겠냐며 반문하겠지만 사실인 걸 어쩌랴.

 그녀를 가까이할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은 음식점 사장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단양에서 갈빗집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 여주인은 갈빗집보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나 경양식 집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바닷가에서 갓 잡아 올린 풋풋한 생선 같은, 신록의 5월에 삐죽삐죽 돋아나는 새순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어찌 됐건, 딴마음 먹고 그녀와 연을 맺게 해 줬다고 생각지 않는다. 타향살이 하는 나로서는, 시집간 동생과 얼굴이나 나이도 비슷해 보고플 때마다 더 들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주인여자가 몇 번이나 나를 보았다고 그녀와 연을 맺게 해 줬겠는가. 잘못하다간 오해를 살 일이니 말이다.

 그녀가 마음속에 자리하기도 전에 이별해야 다. 정을 나눌 겨를 없이 떠나보내야 한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환한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꽃 있는데 벌이 날아드는 게 자연의 섭리요, 인간의 질투심은 하늘을 찌른다고 하는데. 그러니 누구한테 돌봐 달라고 애원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만에 돌아와 보니 그녀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고독의 밤을 보낸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처음 내게 다가올 때 발랄하고 환하게 웃음 짓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생기 잃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꾸고 있다. 봄바람에 수줍어 피는 새색시의 얼굴이 한 여름 장마 비를 만나고 난 뒤의 몰골 흐느끼고 있다. 40을 훌쩍 넘긴 여인의 을 보이며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마치 그 모습은 전쟁터에서 신음하는 병사 다를 바 없다. 꽃 피어나면 10시간 이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렇게 그녀의 생명도 끝이 나는가.

 갈증에 목 놓아 우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고독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으스름달밤에 누구라도 찾아들면 덜 외로울 게 아닌가. 바람이라도 붙들어 친구가 되게 해줘야 한다. 어둠을 가셔 내는 진혼곡이라도 불러야 한다.

  방 으로 들이자 그녀는 자기의 자리를 찾은 것처럼 생기가 돈다. 안심이 되는지 안도의 숨 몰아쉰다. 사방에 향기가 진동한다. 생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 그러나 그것도 잠깐, 여러 날을 시달려 그런지 본래의 빛깔을 잃어간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얼굴에 쓸쓸함이 더해가듯 그녀의 얼굴에서도 초췌함이 묻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화(折花)를 가정에 두지 않나 보다.

  꽃이 꺾이면 자연 상태에 있을 때보다 생명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꽃이 시울면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향기나 색깔이 원래보다 못하고 생명을 억지로 연장할 뿐이.

 그녀는 생명이 줄어들고 나서도 사랑다운 사랑을 받지 못했다. 지구상의 모든 식물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며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한다고 하는데 절반의 생명을 내주고나버지 절반을 내줘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몸을 흐느적거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인가.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 가까이 다가가 보듬어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안달하는 모습이라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다.

그녀에게서 시선이 오랫동안 머문다. 그것은 그녀의 생명이 다했음을 암시한다. 그녀의 생명을 되돌릴 시기는 이미 지났음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애처로움이 느껴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꺼져가는 생명을 지켜보는 수밖에.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그녀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 아랑곳하지 않고 초침을 먹어갈 것이다.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누구든 생의 시계를 멈출 수 없다. 결국 그녀는 초침에 잠식되어 나에게서 멀어져 갈 것이다.

 시간에 굴복하고 정제된 마음으로 그녀를 가슴으로 안아야 한다. 생명이 다해 검은 옷으로 갈아입을지라도 곁에 두고 봄을 기다려야 한다. 시들면 마음에 물을 주고 색깔이 변하면 온몸으로 채색해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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