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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내가 좋다

by 원당

경험해 보지 않은 새로운 직업 현장에 발 디딘 지 반년이 흘러간다. 일을 시작하고 한 달을 버틸 수 있을까, 수습 기간이 3개월이라고 하는데 참아낼 수 있을까, 그런 불안과 긴장 속에 봄은 벌써 보안실 뜰 앞까지 와 있다. 서설이 걷힌 뜰엔 영산홍과 철쭉이 지고 이팝나무 꽃이 국수가락처럼 흐드러지게 매달려 있다. 산과 들에도 녹음이 짙어지며 봄의 서곡을 알린다.

일이 힘에 부치든 그렇지 않든 마음먹기에 달렸다. 몸에 익은 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짜증이 나는 법, 낯선 일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직업 자체가 사회적으로 경시되고 멸시받아도 묵묵히 버티고 있다. 맡겨진 임무는 놓치지 않으려 하고 툭툭 불거지는 일도 그냥저냥 해낸다. 아무리 생소한 분야라도 해보자고 마음을 추스른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지거나, 일하는 손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 배겨내지 못한다. 저걸 내가 어떻게 해, 전 직장에서는 하급 말단 직원이 하던 일인데 하며 그쪽으로 생각이 굳어지면 손에 쥐었던 작업 도구를 내려놓고 그 현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일이 생소하고 적응하는 과정에 다른 이보다 몇 배의 고충이 따르더라도 부리로 쪼다 보면 그 두꺼운 벽에도 틈이 생겨 자신을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게 한다.



부정적인 사고나 행동은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게 한다.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물리게 한다. 하다 보면 견디고, 견디다 보면 익숙해진다. 밥상에 놓인 숟가락을 드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견디지 못하겠다고 마음의 창에 자크를 걸어두면 일터에서 나와야 한다.



학창 시절을 보내고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은 서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을 동경했고, 성공한 사람들의 옷자락이라도 붙들려고 안달복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나는 일일 학습지 세일즈맨이라도 되고자 상경했다.

밟아 보지 않은 낯선 땅,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서울은 내게 황무지 같은 곳이었다. 빌딩 숲에 갇힌 한 마리의 새요, 바람 불면 그 기세에 금세 여린 대가 꺾이는 가녀린 풀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데 없어 하루하루가 살엄음판을 걸어야 했던 나, 잠잘 곳도 마땅하지 않아 고시촌 맨바닥에서 담요 한 장으로 아침을 맞았다. 고시원에도 계급이 있어 오래 묵어야 주변의 시선을 끌지 않는, 바닥 공간도 여유가 있는 상급의 자리가 내게도 주어지길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견뎠다.




불편한 잠자리를 털고 나와 빌딩 숲 사무실 문을 노크하면서 하루의 일과는 시작된다. 문을 밀치고 들어가 학습지를 권하는 나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그 추운 겨울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에 마음을 의지하듯 내 처지도 다를 바 없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추우면 성냥 하나 그어 그걸로 잠시나마 위안을 삼듯 나 또한 누가 건네는 커피 한 잔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칼을 차고 버티고 있는 광화문 광장 주변에 있는 모 회사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그리고 지금도 기억에 남는 그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H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을 때 잡상인 취급하고 아예 사무실은커녕 문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막던 사람들은 칼 차고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경호원처럼 보였다.

배우고 갖춘 자들의 냉랭한 태도에 나는 좌절했고 절망했다. 그나마 학습지 몇 개 구독 의사를 보인 고객이 있는 날이면 수십 리를 걸은 피로감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헛다리를 짚는 날이면 하루 주어지는 점심값과 차비조차 받기 미안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당이 5천 원이었다. 일의 성과를 떠나 그날그날 일당을 지급받은 셈이다. 하다가 못 견디겠다 싶으면 나가면 되고, 버틸 수 있으면 끝까지 하라는 식이었다.

같이 일하던 세일즈맨 중 몇몇이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나뭇가지에서 채 익지 못하고 병들어 떨어지는 풋과일 마냥, 성과 없이 나가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나처럼 무턱대고 서울을 동경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하여 젊은 나이부터 일일 노동자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이었다. 오로지 하루 일하고 하루치 대가를 받는 일일 노동자였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한 것도 아니고, 한 달 일하면 얼마를 준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물론 수습 기간을 넘기면 정식으로 계약하고 일했겠지만, 그들이 바라는 성과의 목표점, 즉, 학습지 판매량의 수를 게시하고 경쟁을 유도하는 벽엔 걸린 막대그래프를 처다 볼 수 없었다. 상위 몇 % 안에 들거나, 그들이 요구하는 구독 수량을 채울 자신이 없었던 나는 사무실에서 나와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사회에 발걸음 했을 때 마주했던 현장과 몇십 년이 흘러 새로운 직업 세계에 뛰어든 지금을 비교해도 사뭇 그 분위기는 달라진 게 없다.

절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삶의 현장, 버티고 버텨야 살아남는다. 동료와의 갈등, 일의 성과, 보이지 않는 경쟁구도, 대인 관계 등 가리고 살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달라지고 싶을 때는 사용하는 단어부터 바꾸라고 [행복도 선택이다]의 저자인 이민규가 말한다. 안된다, 싫다, 못하겠다는 부정적인 단어를 자주 쓰면 실패를 부르고, 잘 될 거야, 할 수 있어 같은 긍정의 단어를 쓰면 성공을 부른다고.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 말에 따라 생각이 굳어지고 행동으로 표출된다. 자기 암시, 자신과의 대화를 하는 습관을 들이고 긍정의 단어를 쓰는 생활에 익숙해지면 몸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나는 그런 일은 안 해, 그런 일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거지 하면 진짜로 그런 일, 아니 힘에 부치거나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은 아예 엄두도 못 낸다. 내가 평시에 그런 궂은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할 수 있다는 신념아래 자기 암시를 강화하면 마음도 단단해져 도전해 보자는 의욕이 꿈틀거리게 마련이다.

공직에서 간부급 자리로 승진하여 임지 지정되고 나서 나 스스로 결심한 바 있다. 나 자신을 내려놓겠다고. 권위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직원들 앞에서 괜히 무게만 잡고 지시하고 시키기만 하는 그런 상사는 되지 않겠다고. 되레 상사지만 내가 먼저 무너지자고. 허수룩한 면도 보이면서. 너나 나나 똑같은 직장인이며, 집에 가서는 가장이며 남편이며 아내니,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하에 승진 발령받고 첫 출근 날 자리에 앉았던 기억, 아직 새롭다.

30여 년이 훨씬 넘는 직장생활을 했어도, 각종 사회 활동을 통해 경륜을 쌓았어도 그것은 지난 일이다. 아무리 똑똑해도 그 예전의 자리는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이곳에선 햇병아리며 새끼 독수리이다.

여전히 어설픈 게 많고, 하루하루가 새롭다. 하지만 양지바른 곳을 찾아 먹이를 쪼는 병아리처럼 한 발 한 발 나가고 있다. 날개 젖는 법만 가르쳐 주고 무심하게 떠난 어미를 바라보고 있는 새끼 독수리일지라도 언젠가 상공을 훨훨 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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