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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밥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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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20. 2023

팽이

팽이를 후리고 싶은 마음에 몸이 들썩인다. 공연장에 모인 구경꾼들은 흘러나오는 민속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눕혀 놓은 절구통을 막대기로 두드리며 신명을 즐기지만, 그들을 뒤로하고 팽이채를 집어 든다. 팽이를 양쪽 손으로 쥐고는 힘껏 돌린다. 중심을 잡지 못한 팽이가 고꾸라진다. 그러기를 몇 번, 땅에 곧추서는가 싶어 채찍으로 힘을 가하는데 또 쓰러진다.



팽이의 모양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것과 별다르지 않아 정감이 간다. 위는 뭉툭하고 아래는 뾰족한 역삼각형에다 그 끝에는 쇠 구슬이 박혀 있다. 속이 단단한 나무를 원형으로 깎아 만들었는데, 자작나무인지 박달나무인지 구별하지 못하지만 손때가 어지간히 묻어 있어 추억이 되살아나게 한다. 그런데도 구경꾼들은 팽이엔 관심이 없다. 앉아 쉬며 음악을 듣고 음료수를 마시며 춤꾼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린다.


팽이는 혼자 돌지 못한다. 누군가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채가 되려 하지 않았다. 울타리 안에서 지내기보다 대폿집에서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남는 시간엔 다방에서 소일했다. 객지에서 한 달에 한 번꼴로 주말에 집에 들러도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낚시터로 내달았다. 대학을 나온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와 가정부처럼 일만 했다. 새벽부터 소죽을 끓이고 절골에서 물지게로 우물물을 길었다. 들에 나가는 게 아버지와 정을 나누는 것보다 마음 편했는지 나를 비롯해 여동생들이 학교에 가지고 갈 도시락을 툇마루 한옆에 챙겨놓고는 일터로 갔다. 둘째 여동생을 낳기 이틀 전에도 똥지게를 지는 어머니였다.

결혼은 사랑을 떠나 가족을 책임지는 일이다. 어느 하나가 비틀거리면 중심을 잡아주고 힘들어하면 부둥켜안고 가야 한다. 살다 보면 힘든 날이 얼마나 많은가. 넘어지고 부딪히고 상처받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 줄 반쪽을 그리워한다. 기대고 싶어 진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밖으로만 돌았다.


 팽이와 채가 따로 노는 격이다. 얼굴도 모르고 중매로 만나 결혼했을지라도 첫날밤부터 잠자리를 거부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어머니는 아버지를 멀리했고, 어머니의 투정이 거듭될수록 아버지는 하숙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렸다. 신랑 될 사람이 땅 마지기 있는 부잣집이고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라는 중매인의 말에 현혹되어 얼굴도 모르고 시집온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어머니는 구석에 놓인 팽이처럼 혼자서 들에 나가고 홀로 밥상에 앉았다. 얼굴 잘생긴 신랑이 남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 모르나 속 빈 강정처럼 허울만 좋았다.


팽이는 채를 든 사람의 기분에 따라 춤춘다. 채 따라 집안 식구들은 울고 웃는다.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나는 커서 저러지 말아야지……. 그런데 부전자전인가. 어느 때부턴가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하던 짓을 따라 하고 있었다. 때론 팽이가 되고 어떤 때에는 채가 되어야 하는데 중심을 잃고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나이 들어 장가들고 애를 낳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런 나를 꾸짖지 않았다. 남편이 싫으면 애들도 눈 밖에 나는지, 내가 집에 자주 들르지 않아도, 전화로 안부를 수시로 여쭙지 않아도 나무라지 않았다. 일을 나가면서도 개떡을 쪄 살강에 얹어 두고 출출할 때 먹으라던 어머니였는데, 떡은커녕 그런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있어도 어머니는 혼자다. 내가 집에 가도 어머니는 혼자다. 배곯아 허기져도 같이 일할 사람 옆에 없어, 이마에 맺힌 땀 닦아주며 목마를 때 막걸리 한 대접 따라주는 사람 없어, 콩대를 두드리고 들깻단을 쳐댔다. 아버지가 팽이채를 집어 들면 어머니는 주저앉고 어머니가 돌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채를 내려놓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운남성 민족촌 거리를 걷는다. 상점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경쾌하지만 애절하다. 사연이 있는 듯 비련의 음조가 풍긴다. ‘아미새’와 ‘고장 난 벽시계’. 시골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는 노래다.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애창곡이 된 두 곡. 때로는 덩실덩실 춤추며 부르지만 얼마 안 가 음정이 흐트러진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밉기만 했던 사람, 아름답지만 애간장을 태웠던 남자, 그리움에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춰 섰는데 세월은 멈추지 않는다며 속울음 삼킨다.

혼자 부르는 노래는 슬프다. 아무리 가락이 좋아도 들어줄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한다. 혼자 부르면 흥이 나지 않거니와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처럼 가락이 서걱거리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흙에 마음 붙이고 산단다. 손뼉 치며 노랫가락에 장단 맞추며 살자 해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몸 맡기는 게 편하다며 시골에서의 삶을 고집한다. 비대칭의 몸을 쇠 구슬에 의지하는 팽이의 몸짓으로 상추와 옥수수를 심고 화단에서 꽃을 가꾼다.


팽이는 도는 동안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단조로움에도 개의치 않는다. 자리를 탓하지도 않는다. 또한 더 돌려고 억지 부리지도, 곱디고운 몸짓을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매운 채찍에 상처받고 세파에 휘둘려 몸에 멍이 들지언정 모난 몸뚱이를 탓하지 않는다. 돌 때에는 꽃잎처럼 분별없는 흩날림이 없고 주저앉더라도 꽃이 진 자리처럼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팽이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팽이에서 어머니의 세월을 읽는다.


어머니는 팽이다. 당신의 몸을 돌려 자신의 마음을 돌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린다. 보아주는 사람이 있건 없건 혼자서 돈다. 혼자서 몸을 흔든다.


쓰러지기만 하던 팽이가 살아 움직인다. 세상을 향해 돌기 시작한다. 채찍의 아픔을 뒤로하고 운남민족촌 공연장에서 빠져나온다.




    (2014. 공무원 문예대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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