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느티나무를 심는 날 많은 비가 내렸다. 땅이 질퍽거리고 비에 젖은 옷이 몸에 척척 달라붙는 날씨였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를 심었다. 느티나무와 함께 생을 꿈꾸고 미래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기쁨에 어떠한 비도 그를 작업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퇴직을 삼 년 남겨두었던 어느 해 가을이었다. 그는 살던 집은 그대로 두고 시골과 도시를 오가는 삶, 일명 ‘세컨드 하우스’의 주인이 되고 싶어 했다. 궁리 끝에 그는 그의 친구와 속리산 자락 묘봉 아랫마을로 스며들었다. 천여 평의 밭을 구하고는 필지 분할하여 등기까지 마쳤다. 그리고는 틈날 때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듣고 나눔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연수(硏修) 동 건물 삼 층 베란다에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보다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 같았다. 동트기 전 늪을 찾아 사진을 찍고 양로원이나 불우 시설을 찾아 봉사하고 싶어 했다. 하다못해 몇 푼이라도 벌어 손자 손에 용돈 쥐여줘야 한다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 그의 손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담배를 피워 물지 않았을 뿐 뿌윰한 근심이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밭에 설치한 컨테이너가 꼴이 우스워도 여기저기 덧칠하고 손을 대니 그럭저럭 별장으로 쓸 만해 보였다. 밭 한쪽에 작은 연못이 있고 울타리에 심은 갖가지 꽃 묘와 나무에서도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비닐하우스에서는 상추와 쑥갓이 자라고 한겨울에는 그 안에서 차 마시는 부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사진으로 본 그의 안식처는 직장생활에서의 고단함을 녹일 동면(冬眠)의 장소로 괜찮아 보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건강에 자신 있던 그가 몸져눕고 말았다. 그깟 비 대수롭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느티나무를 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약봉지 들지 않고 버티던 몸은 열흘이 가고 보름이 지나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여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그를 짓눌렀을까. 그에게 상징과도 같은 느티나무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말라죽어가는 바람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서일까.
인생 2막을 펼치는 과정이 녹록할 리 없다.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돌덩어리가 찍어 누르는 것 같고, 일이 꼬일 적에는 칠흑 같은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농사일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교감하는 일도, 몇 가구 살지 않는 동네의 한적함도 그가 이겨내야 할 고독이다. 나누는 것도, 겨울을 나는 것도,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을 찾는 것 또한 그가 넘을 산이다.
뭐에 끌려 산자락 밑에 발을 구해 정착하려 했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껄껄 웃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아버지에게 불려 나와 물이 텀벙거리는 논에서 모를 짓고 비료를 뿌리고 논둑의 잡풀을 베었다고 했다. 남들은 학교 가기도 바빠 쩔쩔매던 이른 새벽부터.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소 풀을 뜯기고 밭일까지 했는데 농촌 생활에 무슨 덧정이 남았냐고 하면서. 농사라는 거창한 단어를 꺼내지 않더라도 시골 삶에 대한 향수를 건드렸다고나 할까. 그의 얼굴은 그리움과 막연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 시절 농촌은 배고팠다. 비료가 부족해 개똥까지 모아 거름으로 보태 쓰던 시절이었다. 나 또한 동네 사람들과 어우리로 손모를 심던 중학생이었던 어느 일요일을 잊지 못한다. 예닐곱 첨 모를 심으면 못줄이 넘어가는데 어른들 일손을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여 모를 날라 대주는 일을 했는데 곤죽 같은 논에서 발이 빠지지 않아 흙탕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어린이날은 으레 고추를 심고, 가을날에는 깨알이 떨어질 걸 염려하여 이른 새벽부터 참깨를 베기도 했다. 그런 시간의 흔적을 추억이라고만 해야 할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해 동안은 논농사를 짓기도 했는데, 일할 때마다 어쩔 수 없어 물 논에 발을 담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의 욕구를 채우려 여행을 떠난다. 배고픔에 굶주리면 먹을 것을 찾아 나서고 졸리면 편히 누울 곳을 마련하려 찬바람을 마다한다. 사랑에 목마르면 자기 가슴을 덥혀 줄 반쪽을 그리워하듯, 그 반쪽을 위해 자신의 가슴을 데운다. 충분한 것 같으면서도 부족함을 느끼고 넉넉한 것 같으면서도 채우지 못해 곳간을 동경한다.
걸어가는 길이 바른지 그른지 가리기 쉽지 않지만, 옳은 길도 그른 길도 없다고 본다. 결과만을 생각하고 길을 선택하는 것 어쩌면 도박일 수 있다. ‘내가 그 길을 걷는다면…, 그 길은 괜찮을까?’ 주판알을 튕기기 쉽지만은 않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 아니어도 숙명처럼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맞이하는 하루가 수수께끼 같은 삶, 결핍이 생활에 탄력을 준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으려면 망설인다. 이걸 입을까 저걸 입을까? 막상 꺼내 입어도 양에 차지 않아 도로 집어넣는다. 그러다 결국 입고 나가는 것은 몸에 익숙한 옷이다. 특별하지는 않더라도 몸에 편한 옷으로. 은퇴 후의 삶도 어쩌면 옷을 꺼내 입는 것과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몸에 맞는 옷처럼 몸에 익은 일만 있을까?
그는 오늘도 느티나무를 키워 올리기 위해 많은 시간을 고민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뻐꾸기 울고 부엉이 소리 듣던 고향의 언덕을 떠올리며 밭에서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몸에 걸친 옷이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해도 그의 몸에 익숙해질 어느 봄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