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 앞에서 손이 떨린다.
뒷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온몸이 경직된다. 메뉴를 고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등 뒤의 시선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 실제로 누가 뭐라고 한 건 아닌데, 이미 혼자서 '민폐'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카페에서도 마찬가지다. 친구와 대화하다가 문득 목소리 크기를 점검하게 된다. 옆 테이블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면 부모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걸 본다. 아이를 달래는 것보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게 먼저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을까.
일본의 정신과 의사 구마시로 도루는 이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사회적 표백'. 소음, 느림, 서툼 같은 이질적인 것들을 지워버리고, 도시 시스템에 맞는 '무해한 시민'만 남긴다는 뜻이다. 그가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효율이 지상 과제가 된 사회에서는 능력 부족과 도덕적 타락을 동일시한다. 일을 빠르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민폐를 끼치는 행위로 간주하고, 곧바로 악인의 프레임을 씌워버리는 식이다."
_<'쾌적한 사회의 불쾌함'의 저자 구마시로 도루(熊代亨) - 일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터뷰 중(경향신문, 2026년 2월 11일 게재)>
예전에는 달랐다. 일을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저 친구 좀 굼뜨긴 하지만 성실해.' 그런 문장이 성립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업무 처리가 느린 동료는 '민폐 캐릭터'가 되고, 회의에서 말을 더듬는 사람은 '무능력자'로 분류된다. SNS에서 '직장 빌런' 콘텐츠가 수백만 조회수를 찍는다. 능력의 문제가 인격의 문제로 바뀌어버렸다.
이상한 통계를 하나 봤다. 성인 ADHD 환자가 5년 만에 다섯 배 가까이 늘었다는 거다. 2020년에 2만 5천 명이었는데, 2024년에는 12만 명을 넘었다. 특히 30대 여성은 여덟 배 가까이 증가했다. 진료비만 1천억 원을 돌파했다.
의학이 발전해서 진단을 더 잘하게 된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구마시로는 다르게 본다.
"의학이 발전해서 환자가 늘어난 게 아니라, 사회의 허용 폭이 좁아져서 환자가 양산되는 꼴이다."
예전 같으면 '좀 특이한 사람', '산만한 친구'로 넘어갔을 이들이 이제는 '교정해야 할 환자'로 분류된다. 도시가 요구하는 집중력과 소통 능력의 기준선이 점점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 미달하면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빌런으로 낙인찍히거나,
병원 진단서를 받거나.
우리는 지금 서로를 향해 '너는 정상인가'를 묻는 거대한 검문소를 운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노키즈존이라는 말이 처음 뉴스에 등장한 건 2014년이다. 카페에서 어린이가 뜨거운 음료에 화상을 입은 사건이 계기였다. 당시에는 논란이었다. 찬반이 팽팽했고, 차별 아니냐는 목소리도 컸다.
10년이 지났다. 지금 노키즈존은 논란이 아니다. 그냥 정보다. 카페 검색 앱에서 '주차 가능', '와이파이 무료'랑 같은 줄에 '노키즈존'이 붙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단어가 별다른 저항 없이 필터 옵션이 되어버렸다.
구마시로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은 본질적으로 효율성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존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고 뛰어다닌다. 즉,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도시의 제1원칙을 태생적으로 위반하는 존재인 셈이다."
과거에는 공동체가 그걸 감당했다. 아이가 울면 '저러면서 크는거지'라고 했다. 지금은 다르다. 표백된 사회에서 아이의 소음은 '잡음'이 되고, '민폐'가 되고, 극단적으로는 '악'이 된다.
일본에서는 초등학교가 운동회 소음에 대해 주민들에게 사과문을 돌렸다는 뉴스가 나왔다. 한국은 아예 운동회를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어디로 가는 걸까.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2명. 세계에서 유일하게 0명대다. OECD 38개국 중 출산율이 1명 아래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2024년에 0.75명으로 소폭 반등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OECD 평균의 절반에 못 미친다. 정부가 18년간 쏟아부은 돈이 380조 원에 달하는데, 출산율은 오히려 절반으로 떨어졌다.
구마시로의 해석은 이렇다.
"나 하나 무해하게 살아남기도 벅찬데, 어떻게 유해한 존재를 세상에 내놓겠는가. 그 저항이 저출산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혹한 말이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매 순간 자신을 검열하며 '무해한 시민'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청년들에게, 통제 불가능한 존재를 책임지라고 하는 건 시스템과 사투를 벌이라는 말과 같다. 아이는 예측 불가능하고, 시끄럽고, 느리다. 효율 사회가 가장 싫어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겉으로는 다양성을 외친다. 채용 공고에는 '다양한 인재 환영'이라고 적혀 있다. ESG 보고서에는 '포용적 조직문화'가 강조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개인을 우대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조용히 밀려난다. 말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구마시로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가혹하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일본보다 더 상향 평준화 압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가치를 오직 기능으로만 평가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생각했다.
나도 그 검문소의 일부는 아닌가.
느린 사람을 보면 답답해하고, 회의에서 횡설수설하는 동료를 속으로 한심하게 여긴 적이 있다. 아이가 우는 카페를 피해 다녔고, '민폐'라는 단어를 별생각 없이 써왔다. 효율과 쾌적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거기에 맞지 않는 존재들을 불편하게 느꼈다. 하지만 누구도 항상 빠르고, 정확하고, 조용할 수는 없다. 나도 언젠가는 느려질 것이고, 서툴러질 것이고, 누군가에게 '폐'가 될 것이다.
구마시로가 인터뷰 마지막에 한 말이 계속 맴돈다.
"개인을 걸러내고 있는 사회는 결코 유토피아일 수 없다. 무엇이 정상인지에 대한 기준은 의외로 불확실하다. 이제는 부적응자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정상으로 여겨지고 건전하다고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쉬운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느린 것이 죄가 되는 사회는, 결국 모두를 죄인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