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신자들은 그들의 위대한 신을 모시며, 조상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는 결심을 굳게 한 애국적인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그 연단에 선 우사 김규식은 '조선혁명운동(The Korean Revolutionary Movement)'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대종교'를 유럽 무대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을 지낸 그가, 단군신앙을 품은 조선의 젊은이들 이야기를 낯선 청중 앞에 꺼내든 순간이었다. 심지어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당시 대종교는 국내를 넘어 만주와 연해주까지 교세를 뻗치고 있었다. 단군을 교조로 받들며 한민족의 구심점을 자처한 이 종단은 청산리 대첩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을 놓았으며, 조선어학회 활동의 뒷배가 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대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이름의 지명도에 비해 훨씬 크다.
흥미로운 것은, 대종교로 귀의한 이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시경은 감리교 신자로 신앙생활을 하다 대종교에 입교했다.
안재홍은 YMCA에서 활동하던 중 귀의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동지 우덕순은 청산리 독립전쟁 이후 대종교 재건을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에도 참여했고,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을 맡아 선교에 헌신한 석오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뼈대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장에 오른 그를 동지들은 '석오장'이라 불렀다. 김구는 그를 두고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 선두에 내세우고 자기는 타의 부족함을 보조하고 계도함을 미덕으로 여겼다"고 회고했다.
안창호와 이동휘 같은 지사들도 대종교 사상에 깊이 공명했다. 불교 고승 운허 스님(이시열)과 천도교 대구교구장으로 알려진 홍주일도 본래 대종교인이었다.
이들은 단지 신앙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대종교는 교리이기 이전에 민족 정체성의 언어였다. 다른 종교와 다른 이념을 품고 살면서도, 단군이라는 이름 아래서는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대종교가 특정 신념의 울타리가 아니라 민족 연대의 마당이었음을, 이 사람들의 삶이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