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만주 화룡현 청산리 일대의 골짜기에서 열흘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이 전승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뚜렷한 무장투쟁의 성과로 기록된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대종교 종사)이 상해 임시정부에 제출한 공식보고서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1,257명이라고 명시되었다.
<백포 서일 북로군정서 총재의 임시정부로의 승전보고(독립신문)>
그런데 우리는 이 전투를 이야기할 때 대개 김좌진 장군과 백운평 골짜기 매복 장면에서 멈춘다. 사실 그 앞에 더 긴 이야기가 있다. 신흥무관학교 → 대한독립의군부 → 길림군정사 → 북로군정서로 이어지는, 10년에 걸쳐 쌓인 무장투쟁의 흐름이다. 그리고 그 흐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줄기가 바로 대종교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을 비롯한 신민회 계통의 독립운동가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국내에서의 저항은 한계에 달했다. 독립군을 직접 길러내는 기지를 만주에 세워야 한다. 이 결단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이회영의 여섯 형제는 집안의 전 재산을 처분했다. 당시 시가로 40만 원에 달하는 자금이었다. 명문 사대부 일가가 전 가산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1911년 6월, 만주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낡은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가 문을 열었다. 학생 40여 명, 교장은 이동녕이었다. 초라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이 강습소는 이후 신흥중학교를 거쳐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정식 개교하면서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독립군을 길러냈다. 청산리 전투에서 총을 든 독립군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들이었다.
역대 교장과 핵심 교사들의 면면을 보면 대종교와의 연결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초대 소장 이동녕은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후 대종교에 입교했고, 단군의 국조 사상을 민족 독립의 정신적 근거로 삼았다.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에도 참여했다.
2대 교장 여준(呂準)은 대한독립의군부 총재를 맡으며 길림군정사를 이끈 인물로,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인 중심 축이었다. 교사로 활동한 박찬익은 1911년 북간도에 대종교 시교당을 처음 세운 인물이고, 최종 교장 이세영도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39인 중 한 명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재건해 광복 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전신)으로 이은 이시영 역시 대종교의 원로원장·사교(司敎)를 지낸 대종교 원로 인사였다. 학교의 첫 교장에서 마지막 재건자까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는 대종교인들의 손에서 시작되고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는 단순한 군사학교가 아니었다. 학교를 운영한 민단조직 경학사는 공리회 → 부민단 → 한족회로 발전했고, 서간도 유하·통화 일대에 30여 곳의 소학교를 세워 신흥무관학교에 인재를 공급하는 교육망을 갖췄다. 1917년 일제 보고에 의하면 인근 4개 현의 학교들에서 공통으로 병식체조, 즉 군사학을 가르쳤다. 1917년 6월에는 연합 대운동회에 2,300여 명의 학생이 제복을 입고 목총을 들고 참가했다. 독립군 양성은 이미 지역사회 전체의 사업이 되어 있었다.
1918년에는 이 역량이 길림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부민단 교육회장을 역임한 여준이 길림에서 동성한족생계회를 조직하며 서·북간도를 아우르는 더 큰 무장투쟁 기지를 꿈꾸었다. 그 꿈이 구체화되는 계기가 1918년 말의 파리강화회의 소식이었다.
1918년 12월 상해의 신규식이 만주로 밀서를 보냈다. 파리강화회의 개막을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으라는 내용이었다. 밀서를 받은 정원택은 즉시 길림으로 향해 여준·박찬익·조소앙·황상규·김좌진 등과 모였다. 1919년 2월 27일, 여준의 집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결성되었다.
여준이 총재, 군사는 김좌진, 선언서 기초는 조소앙이 맡았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대한독립선언서」다. 39인 서명자 중 김동삼·여준·이동녕·이상룡·이세영·이시영·박찬익·황상규·임방·김좌진 등 상당수가 신흥무관학교 관련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또한 대부분 대종교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인물들이기도 했다. 선언서의 마지막 문장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는 외교가 아닌 무장투쟁을 선택한 이 사람들의 결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선언서 배포에 그치지 않았다. 선언서 4천 부를 인쇄하여 국내, 서북간도, 러시아령, 미주, 일본에 우편으로 발송했고, 곧바로 조직적 무장투쟁을 위해 길림군정사로 재편했다. 길림군정사에는 이상룡·박찬익·조성환·김좌진 등 신흥무관학교 계통의 인사들이 핵심을 채웠다.
길림군정사와 별개로, 북간도 왕청현에서는 또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종교 중광단에서 출발한 대한정의단이다. 1918년 10월 무렵 중광단의 서일(徐一)은 무기를 구입하고 폭탄제조업자를 고용하며 무장 준비에 들어갔다. 3·1운동 직후에는 대종교 신도 1만 5천 명으로 구성된 자유공단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정의단을 설립했다.
하지만 대한정의단은 무장투쟁 조직으로의 변모를 꾀하면서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실전 군사전략을 지휘할 전문 무관이 없었다. 대종교·공교회 중심 인물들이 주축이었던 만큼 신앙과 의지는 충만했지만, 근대식 전술 훈련을 받은 군사전략가가 부족했다. 결국 서일은 길림군정사의 김좌진·조성환·이장녕 등 신흥무관학교·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전문 무관들을 초빙하는 방식으로 그 공백을 메웠다.
1919년 10월, 길림군정사의 군사전략가들과 대한정의단이 합작하여 북로군정서가 탄생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대한군정부의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변경하도록 조건을 달아 공인했다. 세간에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서일이 총재, 김좌진이 사령관을 맡았다. 대종교의 신앙과 의지 위에 신흥무관학교의 군사적 역량이 결합된 조직이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부대를 실전에 내보내기 전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그 교관들을 어디서 구했는가.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와 신흥학우단에 직접 연락하여 교관과 졸업생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에 응해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박영희·오상세·백종렬·강화린·최해·이운강 등을 북간도로 보냈다. 1920년 9월 사관연성소에서 298명의 제1기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청산리 전투가 1920년 10월이었다.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들을 살펴보면 신흥무관학교의 그림자가 짙다. 참모장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이었다. 사령부 부관 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소대장 김훈·이운강, 중대장 오상세, 제2학도대 구대장 백종렬, 학도단 구대장 강화린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이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이긴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쌓아온 훈련의 결과였다.
청산리대첩은 북로군정서 단독의 승리가 아니었다. 서로군정서도 깊이 연루되어 있다.
서로군정서는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서간도 민단조직이 그대로 군정부로 전환된 것이었다.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 사령관 이청천 모두 신흥무관학교 계통이었고 또한 이들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1920년 7월 일본군의 수색작전으로 서로군정서가 유하현을 떠나 안도현으로 이동할 때, 이청천이 이끄는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사관생도 약 300명으로 구성)도 함께 움직였다. 이들은 안도현에서 홍범도 연합부대를 만났고, 홍범도 부대가 제공한 무기로 무장하여 전투에 합류했다.
청산리전투의 가장 치열했던 어랑촌 전투.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가납(加納) 연대장을 포함한 대병력에 포위되어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홍범도 연합부대가 소대장의 긴급 연락을 받고 측면에서 지원하러 왔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포함된 서로군정서 교성대가 그 홍범도 부대에 합류해 있었다. 어랑촌에서의 승리는 두 계통의 독립군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소통하며 준비한 연합작전의 결과였다.
그보다 앞선 1920년 5월,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과 서로군정서 헌병대장 성준용 사이에 상호 협력을 명문화한 체약문까지 체결되어 있었다. 청산리 전투는 즉흥적 전투가 아니라 미리 설계된 연대의 산물이었다.
이 모든 계보를 관통하는 공통 분모가 대종교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의 역대 교장들은 대종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초대 소장 이동녕은 대종교에 입교하여 신규식과 함께 선교 활동까지 했고,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2대 교장이자 학교의 실질적 버팀목 여준은 대한독립의군부 총재로 대종교 네트워크의 핵심에 있었다. 최종 교장 이세영은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였다. 학교의 재건자 이시영은 대종교 원로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교사진의 박찬익은 대종교의 북간도 개척자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종교인이었다. 중광단을 만들고, 대한정의단을 만들고, 북로군정서를 조직한 그의 평생이 대종교 신앙과 분리되지 않는다. 청산리전투 직후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 보낸 공식 보고서는 총재 서일 명의로 작성되었다. 그 총재가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종교는 단군으로부터 내려온 고유 주권을 독립의 근거로 삼았다. 외교나 국제사회의 보장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은 처음부터 우리 것이었으므로 되찾는 것이 천명이라는 신념이다. 「대한독립선언서」에 담긴 그 철학이 신흥무관학교의 교육 현장에서, 부민단의 생활공동체에서, 대한정의단의 군사훈련장에서, 북로군정서의 골짜기 매복 진지에서 살아 움직였다.
청산리대첩 이후 대종교와 신흥무관학교 계통의 독립군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일제는 청산리 패배에 보복하여 간도 일대 한인 마을을 무차별 학살했다. 경신참변이다.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는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서일 총재는 1921년 자유시참변 소식에 통곡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이후 대한통의부·정의부·신민부·조선혁명군·광복군 등 독립운동 단체 어디에서든 지도자로 활약했다. 대종교 인사들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민족교육과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씨가 뿌려진 땅은 넓었다.
청산리대첩은 전투 하나가 아니었다. 1911년 유하현 창고에서 첫 수업을 시작한 날부터 1920년 10월 백운평 골짜기에서 방아쇠를 당긴 순간까지, 10년에 걸쳐 만들어진 힘의 폭발이었다. 그 힘을 길러낸 것은 신흥무관학교였고, 그 학교에 정신을 불어넣은 것은 대종교의 신념이었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킨 것이 바로 청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