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판결이 권력과 자본에 기울어졌다는 냉소도, 법원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불만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그럴수록 한 가지 질문이 선명해진다. 법의 생명력을 지탱하는 법률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법의 역사는 곧 법률가의 역사다.”
20년 동안 하버드 로스쿨 학장을 지낸 로스코 파운드는 법을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사회 변화에 맞춰 계속 숨 쉬어야 하는 질서로 보았다. 법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향해 끊임없이 다듬어져야 하며, 그 과정의 중심에 서 있는 이가 바로 법률가라고 믿었다. 법률가의 손을 타지 않는 법은 책 속에만 존재하는 문장일 뿐, 현실에서는 힘을 잃은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 믿음을 한국의 법정에서 묵묵히 실천했던 판사가 있었다.
생전에는 조용히 일하다 떠난 뒤에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故 한기택 판사(1959~2005)다.
한기택 판사는 공적 물건과 자리의 의미를 누구보다 엄격하게 받아들인 사람으로 기억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며 배정받은 관용차는 오로지 출퇴근에만 썼고, 가족을 단 한 번도 태우지 않았다.
“이 차는 공무를 위해 나온 차”라는 이유였다.
김영란법이 제정되기 한참 전부터, 동네 주민이 인사차 건넨 주스 몇 병도 사양했고, 지인들이 가족을 통해 슬그머니 법률 상담을 청하면 그런 부탁을 아예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성당에서조차 그는 ‘판사 한기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로만 남기를 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나간 뒤에야, 함께 미사를 드리던 수녀와 신자들이 “그분이 판사였느냐”고 놀랐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법정 안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앞세우지 않고, 기록과 사실만을 붙들고 판결문을 써 내려가려 했던 사람. 동료와 후배들은 그를 두고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라고 불렀다.
그 별칭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사건기록 다발을 들고 퇴근해, 다시 출근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고 전해진다. 판결문 한 줄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판결에는 법조문을 넘어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배어 있다.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등병에게, 그는 상관의 가혹행위와 죽음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며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았다. 황사가 짙게 끼어 평소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치우던 날, 근무 중 쓰러져 숨진 환경미화원에 대해서는, 나이와 기존 병력을 이유로 책임을 돌리기보다 그날의 노동 강도와 누적 피로를 살펴 업무상 재해로 판단했다.
권력과 자본을 향해선 더욱 엄격했다. 재벌가의 딸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수억 원을 “지인들이 준 결혼 축의금을 전해 받은 것”이라 주장하며 증여세 부과 취소를 구한 사건에서, 그는 이를 증여로 보고 세금 부과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고위공직자의 직계 존·비속이 재산 공개를 거부하는 경우, 최소한 거부 사유만큼은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판결해 공직자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비장애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와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이 충돌한 안마사 관련 사건에서는, 장애인의 생계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영역을 사회가 함께 지켜야 한다는 취지로 약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승진이나 자리보다, 법정과 기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한 뒤 동료 법관들에게 보낸 글에서, 그는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판사로서의 삶이 시작된다”라고 적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직함이 아니라, 법정에서 마주한 사람들과 기록 속에 숨어 있는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내 재판 때문에 누군가가 부당하게 고통받지 않게 해 달라”라고 기도하며 판결문 앞에 앉았다고 한다.
그는 40년 전, 2차 사법파동 때 가장 먼저 서명한 판사이기도 했다.
2005년 여름, 한기택 판사는 가족과 떠난 휴가지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마흔여섯, 한창 재판 경험과 통찰이 무르익던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판결과 글, 동료와 시민들의 기억 속에 남은 삶의 태도는 지금도 조용히 읽히고 회자된다.
법조계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고 말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이런 이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법전을 넘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공과 사를 분명히 가르되 약자의 사정을 헤아리려 했던 자세, 자리가 아니라 기록 속 진실을 붙들고자 했던 고집이야말로 법의 생명력을 지키는 힘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법조인들이 오늘도 어딘가에서 기록을 읽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