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 1988년 우리집은 서울로 이사왔고 1989년 힘들었던 기억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 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 밀어 밝혀 주리라 “
서울 공항동, 김포공항이 내려다보이는 동네에서 네 자매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날이 있었다. 부모가 생계를 위해 집을 비운 사이, 생활고에 짓눌린 아이들은 스스로를 짐이라고 여기며 극약을 들이켰다. 병원으로 옮겨진 끝에 위급한 고비를 넘긴 아이들도 있었지만, 막내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세 살 무렵의 아이였다. 짧은 신문 기사 한 줄에 남겨진 건, “경제 성장”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어떤 삶의 온도였다.
해바라기의 이주호는 그 기사를 신문 사회면 한 귀퉁이에서 발견했다. 그는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배고픔과 죄책감, 그리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마음을 떠올렸다. 100원짜리 컵라면 하나 마음 편히 사 먹지 못하는 현실, 바로 옆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이웃의 그늘진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회상한다. 그 눈물 위에서 한 곡의 가사가 빠르게, 그러나 오래 품어 온 마음처럼 흘러나왔다.
동아일보 1989년 2월 28일(석간) 사회면 〈4 자매 가난비관 동반음독〉 기사 / 해바라기 〈사랑으로〉 가사의 직접적인 모티프가 된 “그 기사”이다.
노래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거센 바람이 부는 벌판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겉으로는 “나는 외롭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솔잎 하나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조차 눈물이 흘러내린다. 세상은 우리에게 강해지라고, 버텨내라고 말하지만, 사실 사람의 마음은 사소한 한마디, 아주 작은 상처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이 한 이미지가 조용히 보여준다. 이 노래는 그 약함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품어야 할 것으로 바라보자고 말한다.
‘사랑으로’가 태어난 배경에는 이렇게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슬픔이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어느 한 가족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당시 한국 사회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경제 지표는 매년 기록을 갈아치웠고, 부동산과 주식 시장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새 아파트 단지와 빛나는 간판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잘 사는 나라”를 꿈꾸었다. 하지만 숫자가 올라갈수록, 숫자로 세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밀려났다. 공항 주변의 달동네와 변두리에는 하루 세끼를 맞추지 못하는 가정이 남아 있었고, 공장에서, 거리에서, 청소 현장에서 몸으로 버티는 이들이 있었다. 성장의 무게를 함께 떠받치던 이들의 얼굴은 TV 화면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올림픽과 개발의 성공을 위해, 그늘은 되도록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지곤 했다.
이주호는 바로 그 틈을 보고 싶어 했다. 공항동 네 자매의 비극은, 개인의 불운이라기보다 그늘로 밀려난 삶들이 어떤 끝으로 몰려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 같았다. 그는 노랫말을 통해 적어도 이 아이들만큼은, 그리고 이 아이들과 비슷한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만큼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노래 속 화자는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누군가 곁에서 함께 서 있겠다는 약속이, 이미 그 문장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는 고단한 삶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자는 제안이고, 넘어지기 쉬운 마음을 탓하기보다 함께 붙들어 주자는 다짐이다. 약자를 향한 시선, 소외된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없다면 이 노래의 가사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랑을 감정이나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곁에 서 줌으로써 드러나는 힘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곡이 세상에 나온 뒤 ‘사랑으로’는 장례식장과 추모식, 학교 행사와 각종 기념식에서 자연스럽게 울려 퍼지는 노래가 되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또 새로운 시작을 앞둔 순간에 사람들은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교과서에 실려 세대와 세대를 건너간 멜로디는, 어느새 “함께 버티는 법”을 나누는 공통의 언어가 되었다.
사랑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바람 부는 벌판에서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이라고.
어두운 곳에 손을 뻗어 먼저 잡아 주는 일이라고.
혼자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작은 햇살 한 줄기를 나누는 일이라고.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정말로 “또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잊기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