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벌새와 새끼고양이 아노

할머니의 마지막 육신을 만나며

by 쓰임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이었다. 며칠 방 안에서 묵은 이불들을 가져다 햇살좋은 마당에 내어 널었다. 곁에서는 얼마 전 가족의 일원이 된 새끼 고양이 ‘아노’가 잔디에서 구르고 뛰며 놀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탈탈 이불을 두드리고 있자니 희뿌옇게 퍼지는 먼지 사이로 아노의 발 끝에서 놀아나고 있는 벌새 한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죽어있는 몸뚱이가 현실감 없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철퍼덕 툭툭 건드려졌다가 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침 대문을 통과하던 주인집 할머니의 시선도 죽은 벌새와 새끼고양이 아노에 닿아 있었다. 고양이들은 고약한 구석이 있다’며 ‘저리 예쁜 새를 잡아 몹쓸 짓을 한다’고 몇 마디 더하고 대문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차마 벌새의 시신을 거둘 용기도 없고, 보고 있자니 거북해서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아노를 죽은 벌새의 몸뚱이로부터 분리해 안아올리고 아노의 이빨 사이에 벌새의 깃털이 끼었다고 깔깔거리며 시선에서 사라졌다.


벌새의 시신을 땅에 묻고 돌아온 아이들은 그간 아노의 손아귀(발아귀라고 해야하나)에서 놀아나던 바퀴벌레와 지네 등 수많은 시신들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동안 나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고요히 정지한 객체가 된 느낌으로 앉아있었다. 요가수업의 마지막에 으레 등장하는 송장체위라는 뜻의 ‘사바아사나’는 매일 죽음을 경험하며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관점으로 풀이된다. ‘사바아사나’ 를 입에 담듯이 담담하게 여러가지 죽음을 마주하고 싶은 것이 이상이라면 현실은 대상이 벌새가 되었든, 죽음을 앞 둔 앙상한 나의 할머니가 되었든 어느 날 갑자기 운명을 달리한 아빠가 되었든 강도를 달리 할 뿐 일관적으로 경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코로나 시절이었다.할머니가 며칠을 못 버틸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요양병원을 찾았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인적사항을 기입하고 철저한 인원제한으로 몇 년간 찾아뵙지 못했던 할머니가 계신 병실앞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병실에는 보는 이 없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이 왁자지껄했지만 그것을 보거나 들으며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적이 흐르는 병실에서 왕왕 거리는 기계음과 간식을 거부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에게 플라스틱 스푼으로 차가운 젤리를 권유하는 요양보호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쟁쟁거렸다. 6인이 누워있는 침대가 점부인 병실에 움찔거리며 들어가 서니 피골이 접해있는 나뭇가지같은 할머니가 간신히 버티고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아-아-’하며 손을 뻗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으로부터 기대하지 못했던 힘에 내심 놀랐다. 섬에서 악착같이 물질과 밭일을 하던 할머니의 힘이 여전히 뼛 속 깊이에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주변이 사라지고 나와 할머니가 남았다. 할머니가 나의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경제불황으로 부도를 맞으며 집을 잃은 아빠와 엄마는 나와 세살 터울 남동생을 흔들거리는 배에 태워 할머니가 있는 섬으로 보냈다. 엄마와 아빠가 언제 돌아오는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엄마가 보고싶어도 전화할 수 없었던 이유가 오사카에서 무너진 가세를 세우기 위해서 밤낮없이 일해야 했기 때문이라거나 빚쟁이들에게 쫒기느라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해들은 것은 불안이 체념으로 바뀌고도 한참 뒤였다.


할머니는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있는 섬에 떨궈진 나와 동생에게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자 어른이었다. 물질과 농사일로 바빴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바다에서 걷어온 몸이 들어간 끈적한 된장국을 끓여두셨다. 구멍가게 하나 없던 조그만 섬에서 나의 유일한 주전부리는 매 달 몇 캔씩 주기적으로 배달되던 동생의 분유였다. 어쩌다 한 번 육지에 장보러 다녀온 할머니가 손에 쥐어주던 별사탕 뽀빠이를 제하고는 재료를 달리하는 된장국과 김치가 주식이었던 나에게 동생의 분유는 달디 달았고 나는 입안에서 가슬거리다가 끈적해지는 분유가루를 보는 이가 없는데도 훔쳐먹듯이 했다. 애들을 섬에 버리고 딴 남자를 만나 사라진 ‘화냥년’이라던 동네 할머니들의 수근거림 속에서 1년 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엄마를 섬의 부두 선착장에서 다시 만난 날, 엄마는 놀랍게도 동생의 분유를 간식 삼았던 나의 행적을 꿰고 있었다. 그렇게 1년 남짓의 시간동안 머물렀던 할머니의 섬에서 우리가 떠나던 날 할머니는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훔치며 배가 거칠게 뿜어내는 포말너머로 점이 될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가 나인지 내가 할머니인지 똑같은 얼굴로 나는 뱃전에서 엉엉 울었다.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명절에 고작 며칠 찾았던 섬과 할머니. 그것마저도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는 뜸해졌다.


할머니는 얼마 허용되지 않은 면회시간이 끝나고 떠나려는 동생과 나에게 앙상한 팔을 공중으로 휘적거렸다. 나는 할머니를 덥석 안았다. 할머니의 나무같은 몸이 나를 안았다. 할머니가 내 손을 뻗어 잡던 그 순간부터 뻐끔 거리며 가슴에 맴돌던 말이 마침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할머니 내가 어렸을 때요. 할머니랑 같이 섬에서 지냈잖아. 그 때 참 좋았어요. 할머니가 곁에 있어주어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내가 너무 늦게 왔어요. 그 동안 못 와서 미안해요.”

그 다음날 할머니의 부고전화를 받았다. 제주로 돌아온 이틀 후 다시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는 이틀 전의 몸으로 굳어있었다. 오열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있었던 것 같다. 조금 경직된 상태로 할머니의 몸을 한참 보던 나를 기억한다. 그것은 사그라들어 이 세계로부터 종적을 감추는 한 생의 기억을 담는 멈춤일지도 모른다. 겨울처럼. 그랬다. 오늘 아침 널부러진 벌새를 보며 나는 어느 해 봄 벛나무를 날아다니던 아름다운 벌새의 날개짓을 떠올렸었다. 할머니의 굳은 몸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귓전에 생생하던 “ 아이고 내 새끼 이쁜 내 새끼”. 나무처럼 아름답게 삶의 풍파를 담아내던 할머니의 손이 눈에 선했다. 겨울은 다가오는 시간의 소리를 머금고 고요하다.


죽음을 대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왠지 모를 이유로 동경하지만 나는 아직 사바아사나를 풀이해내는 활자의 매끈함으로 죽음을 마주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손 잡고 보듬어 안으며 맞닿은 할머니의 피부로 시작해서 나의 피부로 끝이 나는 경계는 어디일까. 경계가 흐리게 섞였던 부분이 내 피부에 남아있는 것처럼 서서히 생기를 잃어 굳어가는 할머니를 나는 겨울처럼 우두커니 마주하고 서서 담았다. 한 때 살갗이 닿으며 느끼던 온기는 다른 것을 틔우는 흙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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