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미하고 싶어요.

모르는 채 두는 것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by 밝음

얼마 전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파비앙이 나왔다. 파비앙은 서촌을 너무 좋아하게 돼서 천착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천착?' 흔히 쓰는 일상적 용어도 아니며, 문서에서도 잘 본 적 없는 낯선 단어였다. 당연히 내국인의 한국어 능력이 더 뛰어나야 맞는 거 아니냐는 에고의 목소리 덕분에 자존심도 살짝 상한다. 이내 그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하려고 파비앙을 추켜세운다. 역시 한국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출중한 두뇌의 콜라보레이션이 훌륭하다며.


천착하다는 동사로 쓸 때와 형용사로 쓸 때 다른 한자 다른 뜻이 된다. 하나는 '구멍을 뚫는다.'는 의미로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하다.'라는 뜻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심정이 뒤틀려서 난잡하다.', '생김새나 행동이 상스럽고 더럽다.'는 뜻이 있다. 파비앙이 쓴 천착하다는 말은 동사의 의미로 보였다.




서촌에 천착하고 싶어 하는 파비앙을 보며 나는 무엇에 대해 천착하며 살아가고 있나, 어떤 것에 천착하며 살아가고 싶나 생각해 보았다. 눈동자를 위로 치켜들고 뇌와 함께 이리저리 굴려보지만, 언뜻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애초에 무언가를 천착할 생각이 없다는 마음만 확인할 뿐이다.


파고들고 연구하는 방식보다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을 사랑했다. 예를 들어보자면 청소년기 한창 연예인 팬심에 빠져있을 때. 오빠들의 일거수일투족과 인적 사항 등을 알아내는 것보다 그저 그 자태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게 좋았다. 비디오가 늘어날 만큼 보고 또 보고, 잡지에 구멍이 날만큼 보고 또 보고. 무언가를 사랑 할 때 나는 장작불을 지켜보듯 바라보는 사랑을 한다.


무언가를 더 깊이 안다는 게 꼭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알아가는 만큼 이해와 기쁨도 늘어가지만, 알아가는 만큼 이해되지 않음도 실망도 늘어갔다. 당연히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그 부정적이고 어둡고 불편한 뒷면의 것들을 함께 갖기가 싫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다. 장작불 가까이에 다가가지 않으면 그 밝음을 더 크게 가질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불에 데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도 천착하는 방식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 작가에 대해서도 그 작품의 상세한 배경과 정보에 대해서도 알고 본다면 분명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작품의 세세한 것들을 해석하고 만날 수 있게 된다. 같은 그림을 보아도 아는 만큼 전혀 다른 것을 보는 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정보들로 인해 무수히 그려볼 수 있는 작품에 대한 나만의 표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내가 작품과 공명해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만들어내는 사랑. 그런 내면의 스파크로 세상의 유일한 작품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감명은 오직 나만의 감명이고, 유일한 사랑이다.




탐정처럼 헤집고 알아내는 것도 관심과 사랑이겠지만, 어느 부분은 모른 채 두고 그것이 존재하는 그 자체를 좋아해 보는 것도 깊은 사랑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모든 것을 알고 자세히 파야지만 그것에 가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만나는 걸 방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 대상을 갖고 싶고, 통제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내 것 아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구다.


내가 추구하는 사랑은 천착보다는 음미다. 거리를 두고 천천히 스며들듯 그것과 하나가 되고 싶다. 우리가 별개의 존재인지 어느 하나인지 시작도 끝도 구분되지 않는 관계성의 합일을 바란다. 내가 그것이 되고, 그것이 내가 되는 순간을 더 많이 경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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