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슬기로운 공원생활
내가 사는 동네에는 큰 공원이 있다. 주말이면 돗자리 깔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매해 축제도 열리니 분명히 작지는 않은 공원이다. 사는 곳 근처에 공원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도심 속에 산다면 더욱 그렇다. 공원이라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메마른 영혼을 달래주는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딱딱한 건물 속에서 매일 쳇바퀴 돌 듯 살다가 생생히 살아 숨 쉬는 꽃과 나무의 곁에 서면, 잠자코 있던 우리의 영혼도 자유롭게 숨 쉬고 생명력을 되찾는다.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위한 도시의 발전 속에서도 조경 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 아닐까?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도록 돕기 위한 작은 방편이 되니까.
고맙게도 매일 동네 공원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도 공원은 최고의 친구가 되고, 남편과 아이들까지 함께 산책할 때는 쉼과 행복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조력자다. 공원의 존재가 나와 우리 가족에게 큰 영향을 끼치다 보니, 미국에 와서도 근처에 갈 수 있는 공원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걸어가기는 어렵지만 다행히 차를 타고 5분 정도 나가면 뛰어놀 수 있는 라즈 앤더슨 공원(Larz Anderson Park)이 있었다.
때마침 주말이어서 아침에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은 후에 소화도 시킬 겸 동생네와 다 함께 라즈 앤더슨 공원에 갔다. 공원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원 입구에 걸어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야구 그라운드가 보였다. 야구의 나라 미국인 만큼 보스턴 곳곳에서 야구장을 볼 수 있다. 학교 마당에도, 동네 공터에도, 곳곳에 야구 그라운드가 있다.
우리 가족은 야구를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한다. 야구 시즌이 되면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경기를 보러 가고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은 야구부 취미반에서 활동 중이다. 토요일마다 야구하며 시간을 보낸 게 벌써 3년이다. 그만큼 야구에 관심이 많고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눈앞에 보이는 자연 잔디 야구장에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에는 이곳처럼 야구할 수 있는 그라운드가 흔치 않다. 구단에서 큰돈 주고 대여를 해야 사용 가능 한 야구장들만 있을 뿐,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늘 아쉽다. 사람 살 땅도 부족하고 공원에 놀이터가 없는 곳도 많은데, 그 와중에 야구장을 바라는 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자라지도 않으니까.
미국에 와서도 야구하며 놀려고 일부러 아이들의 개인 글러브도 챙겼다. 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챙겨온 보람이 있었다. 푸른 나무와 파란 하늘의 대자연을 만끽하며 캐치볼로 몸을 풀고 한참 동안 신나게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공원에서 놀고 있을 뿐인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야구를 끝내고 공원을 걸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큰 나무가 많았고 공원 중간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산책로 중간쯤에는 돌로 만들어진 신전 같이 생긴 쉼터도 있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였다면 나무로 지어진 원두막이 있었을 테다.
그런데 공원을 둘러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건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놀이터에 놀고 있는 가족도, 호수를 바라보며 함께 벤치에 앉아 있는 연인도, 돗자리를 깔거나 의자에 앉아 다 함께 파티 중인 사람들도. 그중 누구도 손에 전화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공원은 온통 웃음이 넘치고, 대화가 가득하고, 여유가 흘렀다.
아이를 낳고 공원에 수없이 많이 놀러 갔지만 늘 ‘너희들은 놀아라, 나는 여기 있단다’ 모드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일상의 고됨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부모들은 아이의 부름에 겨우 몸을 일으켜 놀아주거나, 그것조차 해주지 못해 돗자리 누워 자고 있거나,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아이도 같이 그러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은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놀아주는 게 아니라 함께 노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 시간이 그들에겐 특별해 보였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생기 있었고, 살아있었다. 단체로 놀러 온 사람들도 아빠들만 아이들과 놀아주고, 엄마들은 모여서 수다를 떠는, 그런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야외에서 주류 섭취는 금지여서 술을 먹는 어른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생소한 풍경이 나의 깊은 부분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오리는 한가롭게 걸어 다니고 사람들은 웃기 바빴다. 공원에서 노는 짧은 순간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나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가족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몸과 마음이 그곳에서 진정으로 함께 하는 것 아닐까? 열심히 일해서 뒷바라지하고 훌륭한 아이로 기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지만 정작 아이가 필요하고 원하는 함께하는 순간은 갖지 못하는 것 같다.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중요한 걸 놓친 해 삶 속에서 달려 나가기 바쁜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라즈 앤더슨 공원에 여러 번 오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내가 보고 느낀 생경한 장면과 기분을 놀라운 풍경이 아니라 당연한 풍경으로 여기고 싶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