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움과 체면 사이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옷방으로 간다. 옷걸이도 뒤적이고 서랍도 열어본다. 티셔츠인지, 바지인지, 목티인지, 꺼내서 펼쳐봐야 분간이 될 정도로 모두 시커먼 옷들뿐이다. 검은색, 흰색, 회색. 언제부터인가 내 옷장을 무채색들이 점령했다. 게다가 디자인도 거기서 거기라 굳이 여러 벌을 살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러다가 몇 년 안에는 스티브 잡스도 따라잡을 만큼 단순룩 매니아가 될 듯하다. (참고로 스티브 잡스는 평생 검은색 터틀넥과 청바지를 입었다)
하지만 나는 무채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가장 싫어하는 계열의 색상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통일성 있게 무채색 옷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이유는 이러하다. 일단 이물질이나 먼지가 묻어도 잘 티가 나지 않고, 함께 막 세탁하기 편하고, 다른 옷들과 받쳐입기에도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가장 큰 이유인데 그건 바로 튀지 않기 때문이다. 내 취향이어서 입는 게 아니라 튀지 않고 남들과 잘 섞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들지 않기 위해 입는다. 일종의 위장술이라고나 할까. 돋보이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일부러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딱 질색이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조용히 파묻혀 살고 싶다.
거뭇거뭇한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어릴 적의 나는 정반대 색감의 옷만 입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뚜렷한 원색 계열의 옷을 좋아했다. 90년대에 꼬즈꼬즈(COZCOZ)라는 아동복 브랜드가 있었는데 그 옷을 제일 좋아했다. 상하의 모두 알록달록해서 그 옷을 입으면 마치 내가 무지개 안에 들어가 얼굴만 빼꼼 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았고, 그 옷을 입은 나를 좋아했다.
다양한 원색 중에서 특히 노랑을 좋아했는데, 노란색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초등학교 6학년 소풍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란색 멜빵바지를 입고, 노란색 야구 점퍼를 걸친 채,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다. 남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경악스러울 정도인데, 그만큼이나 나는 노란색을 좋아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색이 노랑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간 것인가? 변한 것인가? 아니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검은색을 골라 입는 내 속에 숨어 있다. 진정한 나를 숨긴 채 나이, 타인, 환경에 순응하며 ‘적절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옷으로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내 자아를 종종 소심하게 머리카락으로 표현했었다. 자주 염색했었고, 삼십 대까지 탈색도 했는데, 사십 대가 되니 머리가 너무 빠져서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머리마저 무채색 인간이 되고, 이제 나의 숨은 자아는 기껏해야 키링, 노트, 폰 케이스 정도의 소심한 방식으로 스스로 표출하며 산다.
무채색을 자주 입고 겉으로는 조용하고 진지한 척을 하지만, 사실 나는 대체로 단순하고 유치한 인간이다. 아침이면 애들이 경악하는 동요를 들으며 즐거움을 느끼고, 둘째와 함께 몸 개그도 하고 짱구 춤도 춘다. 다행히 남편은 그런 나를 귀여워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백 살까지 귀여울 예정이라고.
내겐 혼자만의 은밀한 계획이 있는데, 환갑부터는 제대로 유치하게 살려고 작정 중이다. 애들이 독립하면 내 방을 만들어 다시 노란색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스마일 벽시계를 달고, 노란 발 매트를 깔 것이다. 노란 스탠드를 켜고 노란색 노트에 일기를 쓸 것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즐거움과 안온함을 누리며 영원한 동심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귀여운 할머니가 될 것이고, 그곳에서 오래도록 행복할 것이다. 내 안의 자아가 슬며시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