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마음이 시작된 아름다운 시점의 기록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사랑에 대한 드라마를 보면 '대체 나의 첫사랑은 누굴까?' 고민하게 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싱거운 고민을 하는 것 같지만, 일생일대의 중요한 고민이기도 하다. 대상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그 녀석은 굉장히 미화되기 때문이다. 나는 첫사랑의 좋은 부분을 찾을 것이고, 아름다운 것들만 기억하려고 할 것이다.
첫사랑,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본 것을 말하는 걸까?, 진짜 사랑이라고 할 만한 감정을 가지게 했던 사랑이 첫사랑 일까?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면 지금의 신랑뿐일 텐데 그렇다면 남편이 결국 첫사랑 일까?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다.
첫사랑, 풋사랑, 짝사랑을 총망라한 나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새까만 얼굴에 단단한 몸을 가진 아이. 체육을 잘해서 인기가 꽤 많았던 아이다. 장난 많고 철없는 여느 또래들과는 달리 조금 의젓한 구석도 있는 친구여서 더욱 눈길이 갔던 것 같다.
"딩동댕동~"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곧장 복도 창가로 갔다. 팔짱을 끼고 창가에 기대어 턱을 괸 후 눈은 그 아이를 검색한다. 매일 운동장에 나가서 친구들과 피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보는지 절대 들키지 않게 그냥 운동장을 구경하는 척한다. 가까이서 대놓고 보는 것보다 멀리서 그 녀석의 전체와 화려한 플레이를 구경하는 게 참 즐거웠다. 내가 느끼는 게 어떤 감정인 줄도 모른 채 그냥 좋았다.
분명 같은 반이었는데도 교실 안에서 함께 놀거나 지켜봤던 기억보다 그렇게 멀리서 바라봤던 장면만 선명하다. 그 시간에 남들 모르게 혼자서 마음을 크게 키웠던 모양이다. 5학년이 되어서 다른 반이 되어도 마음으로는 그 녀석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전학 가는 애들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전학자가 된 것이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라서 좋았다. 친했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다. 이제 더 이상 첫사랑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마음 한편에 두고서.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 몇 년 사이 인터넷이 발달되어 그즈음 동창 찾기 사이트가 유행이었다. 밤 9시까지 야자를 했던 학교라서 집에 오면 한밤중이 되었지만 밤늦게 '다모임'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은 놓칠 수 없는 나의 하루 일과였다. 학교에서 봤던 친구들인데도 굳이 쪽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앨범을 꺼내어 친구들을 찾는 것도 큰 재미였다. 그런데 전학 오기 전의 학교가 문제였다. 앨범도 없으니 고작 전화번호부에 적어놓은 친구들의 이름만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제법 흘러서 이름을 보아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이름도 얼굴도 선명했다. 나의 첫사랑.
다행히도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 출생연도와 이름 검색으로 그 녀석을 찾아냈다. 사는 곳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우리 집 근처의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종종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하고 지냈다. 인근 학교다 보니 얼굴 한번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내 친구들과 그 아이 친구들 함께 모여 노래방도 가고 몇 번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축제에 초대받아서 놀러 갔던 기억 이후로 다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고3이 되고 서로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연락이 드문드문 해졌던 것 같다.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되지 못했지만, 종종 내 친구들에게 나이 첫사랑 이야기를 하며 그만큼의 인연에 기분 좋아하며 가끔 추억을 곱씹곤 했었다.
시간은 어찌 이리도 쏜살같은지, 벌써 우리 첫째가 4학년이 되었다. 첫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저 정도 나이였을 때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아들도 이제 누군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나겠구나 싶어 다시 설레기도 하고 말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우연히 보게 된 야구에 빠져서 올해는 전국에 있는 야구 구장에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올여름, 처음으로 창원 NC다이노스 파크에 방문했다. 우리 팀인 롯데 경기도 없는데 여행 중에 꼭 들러보고 싶다는 아우성에 못 이겨 당일 표를 급하게 끊고 구경을 간 참이었다.
경기 전 자리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이리저리 구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 앞줄에 다른 가족들이 앉기 시작했다. 까만 얼굴에 모자를 쓴 아빠와 두 딸을 둔 가족이었다. 내 앞에 앉아 있던 그 아빠가 자꾸 눈에 익숙했다. 누구랑 비슷하게 생겼나 싶어 자꾸 쳐다봤더니 그 녀석이었다. 잘못 봤나 싶어서 몰래 계속 살펴봐도 그 녀석이 확실했다. 소문으로 경남 쪽 체육과에 진학했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었는데 어쩌다 창원에서 결혼하고 정착까지 했나 보다.
아들 둘인 나와, 딸 둘인 그 녀석. 하고많은 날, 이 넓은 야구장에서 떡 하니 우리 앞자리에 앉아있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자리가 안 좋아서 경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애들 때문에 경기 시작할 때쯤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는 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 어떤 대화를 추가로 하기엔 어색할 것 같았다. 그 녀석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나만의 추억으로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참 신기한 인연. 이 녀석과는 또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려나. 나의 첫사랑은 내가 자신을 좋아했던 사실조차도 모른다. 언젠가 또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커밍아웃을 해볼까 싶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건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니까.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각자 건강히 늙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