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보다 여전히 있다는 다행스러운 기쁨
나는 엄마가 두 명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한 명은 낳아주신 나의 엄마고, 한 명은 길러주신 엄마인 나의 할머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14살부터 내가 결혼할 때까지 계속 함께 살았다. 엄마와 살았던 기간보다 할머니와 살았던 기간이 더 길다.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할머니는 고민도 없이 우리 집으로 와서 우리를 길러주셨다. 그해 아빠마저 해외 파견을 가셨기 때문에 가장 마음이 힘들었을 때 곁에 있어주신 유일한 사람이 할머니였다.
아픈 남편을 두고 홀로 6남매를 키워낸 강한 여성. 동네에서도 한 성격 하기로 유명했던 할머니였지만 우리에게만은 그러지 않으셨다. 키우는 내내 한 번도 혼내신 적이 없었다. 엄마 없이 자라는 손녀들이 안쓰럽고 애잔해서 6남매를 기른 노고의 힘듦이 가시기도 전에 2남매를 추가하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함께 한 세월이 길었다 보니 어느덧 고모나 삼촌들보다 나와 동생이 할머니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저 표현이 어떤 마음인지, 척하면 알 정도로 할머니는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어쩌면 아빠보다 더.
내가 결혼을 하고도 다행히 한 동네에 살 수 있게 되어서 할머니를 자주 뵐 수 있었다. 동생과 내가 모두 출가외인이 되고도 아빠는 할머니와 함께 사셨으니 당연한 일이었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불사조가 있다면 그게 할머니가 아닐까 할 정도로 나이가 많으신데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쉬시지 않으셨다. 살림살이는 물론이며, 동네 이리저리를 다니며 볼일을 보시고, 목욕탕에 가서 깨끗하게 단장하는 것도 필수로 챙기셨다. 젊은 우리는 구겨진 옷을 대충 입고 나가는데 할머니는 풀 먹인 모시 한복을 손수 다림질해서 입는 깔끔한 성격이셨다.
내가 결혼을 하고 5년 정도 되었을 때 아빠가 갑자기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1년 뒤에 돌아가셨다. 딸인 내 마음의 무너짐만 살피기 바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그제야 할머니가 보였다. 겉으로 표현하시지 않으시지만 할머니는 늘 아빠를 그리고 있었다. 아빠가 자주 다니셨던 곳들을 발걸음으로 따라가며 산책하고 계셨다.
평생 술로 가족들을 많이 괴롭게 했던 아빠였다. "딸 잘 낳아서 편하게 호강하고 갔다 마, 호스피스가 호텔이드라! 중환자실 같은 데서 고생 안 하고 갔으니 복 받은 기라." 아들의 죽음을 수용하듯 말씀은 하셨지만 속마음은 썩어 문드러진다는 말과 상응했을지도 모른다. 아빠 나이는 환갑 즈음이었고, 할머니는 이미 아흔이 넘은 나이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식의 죽음은 뼈아픈 고통이었고,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가 원망스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도 아직 나머지 자식들이 있었으니 할머니는 여전히 부지런히 사셨다. 몸 아픈 아들 걱정, 혼자 사는 아들 걱정, 아들의 사업 걱정. 주된 일이자 취미가 자식 걱정이었다. 삶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늘 자식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었던 할머니. 밤마다 긴 염주를 한 알 한 알 돌리며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는 웅얼거림은 우리들의 유일한 자장가였다.
가끔 할머니 간식을 사서 애들을 데리고 놀러 가기도 하고, 세탁기 버튼을 잘못 눌러서 멈췄다고 전화 오면 곧바로 뛰어가는 것으로 키워준 은혜를 갚아내었다. 나만의 소소한 보답이었다.
그러다 3년 후, 몸이 편찮으셨던 큰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었다. 할머니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래 오래 살아서 자식들 가는 걸 보고 이라노... 와 이래 안 죽노.. 내가 어서 죽어야 되는데..." 만나기만 하면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자식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을 앞세웠으니 부모로서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살아도 산 게 아닐 것 같은 느낌. 감히 예측해 볼 수도 없는 아픔이었다.
평생 몸을 많이 쓰셔서 동네 의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자주 받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가 많이 아프셔서 근처 병원을 전전하시다가 결국 아버지 형제들의 결정으로 요양병원으로 모셔졌다. 생업이 바쁘고 이미 자신들 몸 돌보기도 어려운 나이의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최선 같았다.
한 달쯤 뒤에 할머니를 뵈러 면회를 갔다.
"삼촌, 할머니 왜 이래요?"
"이제 할머니도 나이가 많아서..."
믿기지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전화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던 할머닌데. 가족들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시고 허공만 멍하게 쳐다보셨다. 귀하게 여기던 아들 둘을 보내고서 허망한 할머니는 스스로를 놓을 것만 같았다. '대체 삶은 무엇인지...' 이럴 때면 또다시 수면 아래에서 떠오르는 나의 내적 물음이다.
코로나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면회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 자식들인 4남매가 자리를 차지하면 내가 신청하는 건 불가능했다. 같은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내가 가겠다고 자식들이 갈 기회를 빼앗을 순 없으니 면회를 자꾸 미루게 되었다. 할머니를 못 뵌 지 몇 달이 흘러버렸다.
올 추석 다행히 다 함께 시간을 맞추어 명절 면회를 다녀왔다. 반가운 할머니. 얼굴만 봐도 눈빛만 봐도 그 마음이 모두 느껴지는 할머니. 면회 내내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지금 살아계시다는 걸 느끼기 위해서, 내 촉감에 할머니를 담아두기 위해서.
첫 면회 때 어떤 말을 시켜도 대답 없이 멍하게 쳐다만 보는 할머니에게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
"할머니, 우리 잘 키워줘서 너무 고마워."
엄마, 아빠가 살아계실 땐 전하지 못했던 그 말을 할머니 살아계실 땐 꼭 전하고 싶었다. 들으셨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에너지는 분명히 그대로 전해졌을 거라 믿는다.
언젠가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예정된 슬픔보다는, 여전히 살아계시다는 다행스러운 기쁨과 자주 만나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이 할머니에게 오롯이 전해지기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