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악몽

산타가 사라졌다.

by 밝음

낙엽들은 겨울의 등살에 밀려 몸을 우수수 떨어트린다. 드디어 나무들도 겨울옷을 하나 둘 입기 시작한다. 추위가 왔다는 증거다. 추위가 왔다는 걸 각자 다른 방법으로 느낄 것이다. 누구는 동네 어귀에 붕어빵 장수가 들어섰을 때, 누구는 근육질을 자랑하는 패딩재킷이 길에 등장할 때.


내가 겨울을 느끼는 방법은 나무 옷이다. 한파로 인한 나무의 동해를 막기 위해 설치하는 수목보호대를 보며 겨울이 왔음을 실감한다. 웬만한 비바람과 태풍에도 나무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데 저 조그만 처치에 큰 뜻이 있겠다 싶었다. 수목보호대는 어쩌면 단순한 덧댐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생명보호대, 삶에서 죽음으로 곧장 이르게 될 수도 있는 일을 막는 백의의 천사.




본격적인 겨울의 입장을 알리는 12월의 어귀에는 이렇게 세상이 알게 모르게 바빠진다. 그중에서 내로라하게 바빠지는 건 바로 아이들의 마음이다. 4학년, 1학년인 우리 집 두 녀석들은 아직 11월 말인데 벌써 나를 닦달하기 시작한다.


"엄마 대체 트리는 언제 설치하는 거야?"

"12월 돼야지 설치하지. 아직 11월씨가 가지도 않았어."


뒤에서 듣고 있던 막내는 한 술 더 뜬다.

"이번에는 무슨 소원을 빌지?"

벌써 산타 할아버지께 받을 선물을 고민하는 이 아이는 스스로 착한 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갑자기 첫째가 나에게 처음으로 대놓고 물음을 뱉는다.

"엄마, 근데 진짜 산타가 있는 게 맞아? 없지?"

"당연히 있지. 산타는 산타를 믿는 아이들에게만 나타나. 엄마가 그랬거든. 산타가 없다고 믿는 순간 크리스마스 선물이 배달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산타를 못 믿겠다면 안 믿어봐도 돼. 산타는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주니까 이제 선물이 끊기면 네가 꽤 많이 컸다는 증거겠네."

"아... 없는 것 같은데.... 아, 아니야. 그냥 소원 빌래."

첫째는 자기 내면의 직관을 무시하고 에고를 굴려 산타를 믿겠다는 믿음을 만들었다.




내가 산타를 믿지 않게 된 건 딱 첫째의 나이인 4학년때였다. 고대하던 크리스마스 날 아침. 눈에 달린 눈곱도 떼기 전에 선물을 확인한다. 어김없이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1994년 12월 25일. 그해의 산타의 선물은 보석상자였다. 여자아이들의 아기자기한 보물들을 보관할 수 있는 상자였다. 뚜껑을 열면 아름다운 오르골 소리가 퍼졌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오르골 소리에 취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즈음 지금 여기로 나를 불러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하트, 나도 하트, 나도 하트으으으으~~~~~"


옆에 있던 두 살 아래 동생이 떼를 쓰기 시작했다. 산타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분명 똑같은 색깔과 소리의 상자였다. 문제는 모양이었다. 내 것은 하트 모양인데 동생 것은 네모 모양이었다. 예쁜 하트가 아닌 딱딱하고 네모 반듯한 상자가 동생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엄마는 동생을 어르고 달랬다. 소용이 없었다. 어쩌면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달래 보았을 수도 있다. 엄마는 동생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우리를 데리고 집 바로 옆에 있는 문구점으로 향했다.


충격 그 잡채.

방금 나를 아름다움에 취하게 한 그 하트 보석 상자가 떡하니 문구점 진열대 위에 있었다.


산타는 없었다. 모두 엄마가 준비한 선물이었다니... 아름답고 환상적인 꿈의 세상은 한순간 사라지고 현실 타격을 받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믿어야 했다. 눈으로 확인했기에 믿지 않을 도리는 내게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다음 해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했다. 산타가 사라졌기에.




어른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아이들은 진심으로 믿는다. 경험증거 불충분으로. 사고의 힘줄이 약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믿고 마음대로 원한다. 자신의 마음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쓰는 것이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걸 믿는 건 부족하거나 어리숙하기 때문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걸 진실로 여길 수 있고 현실에 없는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순수함과 간절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너무 커버린 나는 이제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믿을 수가 없다. 나의 한없는 미래와 세상을 무한정 꿈꾸고 싶지만 헛되고 부질없는 비현실이라고 여기며 지금의 현실과 한계와 악수하며 타협한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삶은 노잼이 되어간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믿을 수 있는 것들이 더욱 옅어진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고,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만들 수 있다. 실재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내가 믿으면 그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꿈꿀 수 있기에 다음을 기다리고 다음 해를 기대한다. 세상에는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직접 보거나 감각적 신호로 느낄 수 없으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몰랐던 것들을 깨닫는 과정일까. 아니면 거꾸로 너무 많은 것들을 안다고 여겨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무한의 힘을 잊어버린 것일까. 지구도 구하겠다는 우리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누가 그를 사라지게 만든 걸까. 세상일까 그 자신일까.


믿었던 많은 것들이 자꾸만 사라진다. 요정도, 산타도, 꿈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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