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결정한 사이를 존중하는 삶
길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은 오늘도 각자의 거리를 유지한 채 거리를 살아간다. 서로 정답 같은 사이를 유지하며 자신의 공간만을 비춘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스스로를 밝히고 자신이 발 디딘 곳에만 존재한다. 다른 등불을 도울 수 없다. 내 불이 꺼진다고 해서 옆 등불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깔끔한 사이의 대가다. 대신 그 객관적 거리 덕분에 다른 것에 피해를 주거나 받지도 않는다. 가로등은 각자도생이다. 가끔은 저 철저한 가로등의 거리가 부럽다. 인간끼리의 사이는 정답도 없으며 한결같지도 않기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다. 아니 생성부터 함께다. 모체가 없이는 이곳에 발 디딜 수 없다.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로 공동체 경험을 가진다. 탄생은 좋든 싫든 누군가와 함께 했다는 이력이다. 함께하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도움도 받고 도움도 주었다. 탯줄을 통해 양분을 받았고 존재 자체가 어미에게는 활력이자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서로 피해도 주고받는다. 품은 존재도 사람인지라 이런저런 흔들림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그건 고스란히 뱃속의 생명체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스스로의 잉태를 위해 자체 노력 중인 태아는 자신의 탄생 자체가 모체에게 힘겨움과 고통을 준다.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관계는 이렇듯 상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육체적 차원에서 철저히 혼자이기는 어렵다. 날 때부터 누군가의 연결을 통해 탄생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신적 차원애서 생각하면 우리는 철저히 혼자다. 여기서 힘든 이유가 생긴다. 이 세상에 수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의식을 가진 건 오직 나뿐이다. 유일한 의식체다. 몸은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데 정신은 철저히 나만의 것이니 늘 관계는 힘들다.
인간 사이는 서로 관계를 가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 관계를 잘 맺고 지내야 한다. 건강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관계라는 단어 자체가 나와 너라는 대상과 대상이 있다. 그렇다면 일단 합일은 스스로를 없애는 행위라는 말이다. 나도 있게 하고 너도 있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분리가 있어야 한다. 상대가 없다면 나도 인식할 수 없다. 각자를 지키고 인식하기 위한 적당한 거리는 분명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적당한 거리는 대체 얼마큼일까?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처럼 정확한 수치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이니 측정이 어렵다. 거리를 느끼는 기준도 '나'와 '너'가 늘 다르다. 요즘 스마트시계가 심박동을 귀신같이 측정해 주는 것처럼 사람끼리의 거리도 물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훌륭한 인간관계 적정거리는 10cm입니다.』
'그렇다면 A와의 거리는 15cm. 음.. 좀 더 친해져도 되겠군.'
'B와의 거리는 6cm. 아… 역시 너무 가까워지니 서로 마음 상하고 피곤해져.'
사람과 사람사이도 이렇게 잴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이로운 관계만이 존재하고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도대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좋은 거리는 얼마일까.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알 수가 없다. 사람을 겪고 또 겪어봐도 모르겠다. 이 사람이 다르고 저 사람이 다르다. 그때의 내 마음이 다르고 지금의 내 마음이 다르다. 나는 이만큼을 원하는데 상대방은 저만큼을 원한다. 나는 아직도 거리가 멀어 사이로 세찬 바람이 지나다니는 것 같은데 상대방은 벌써 답답해진다고 한다. 결국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는 없다.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결국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누군가 나로 인해 피해받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누군가 때문에 내가 피해받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의 상처는 어찌 그리 짙은 지. 아물었다 싶으면 꿰매었던 상처가 다시 덧나거나 터진다.
가로등이 살아가는 획일적인 풍경과는 다르게 나무들이 어울려사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도로를 달려도 달려도 가로등 중에서는 눈길을 끄는 게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들은 그렇지 않다. 분명 똑같은 종인데도 다 다르다. 키가 다르고 두께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껍질 상태도 다르다. 분명 군림을 꾸려 어울려있는데 적당히 거리도 가지고 있다. 어떤 가지들은 서로 얽히기도 하고 누군가의 그늘에 가려 작게 자라기도 한다. 생육환경이 안 좋아 죽은 나무는 거름이 되어 다른 나무의 탄생을 다시 돕기도 한다.
인간은 정형화되거나 완벽히 갖춰진 제품이 아니다. 다르게 태어났고 다른 점을 가졌다. 그러니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어쩌면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게 인간다운 삶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도움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상처를 상처로 두지 않고 성장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인간이라서 서로의 부딪힘이 마냥 나쁜 것이라고 재단할 수도 없다. 그깟 상처. 조금 받으면 뭐 어떤가. 지금처럼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텐데.
하지만 이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 상처는 누가 준 것일까. 상대방은 상처를 준 적이 없는데 ‘이거 내 거구나.’하고 스스로 받아왔을 수도 있다. 주지도 않은 상처 셀프로 받아오지 말자. 주는 상처에도 당당하게 ‘난 필요 없거든.’하고 반품하고 거절하자. 결국 사람사이에 적당한 거리란 그냥 내가 원하는 거리다. 원하는 거리를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맞추면서 나를 소멸시키는 일 없기를. 나를 위하는 게 상대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걸 믿는 우리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