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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Feb 13. 2024

새로운 냉장고를 꿈꾸는 시간

꽉찬 냉장고는 나의 내면을 잠식한다.

어느덧 주부 13년 차. 강산도 변하는 1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기며 살림을 하고 있다. 그 정도 시간을 보내면 베테랑 주부가 되는 줄 알았다. 엄마의 솜씨도, 할머니의 솜씨도 그냥 세월이 키운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월이 만들어낸 능력치가 아니라 그녀들의 마음이 키운 솜씨였다. 나는 살림에 마음이 없으니 애들 유아기를 지나면서 오히려 주부력이 도태되는 기분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은 살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건 기술적인 능력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분명 신랑을 위해 이것저것 열심히 요리했던 신혼기가 있었고, 아이들 먹거리 하나하나 신경 쓰며 만들어낸 시간들도 있었다. 친정아버지가 아프셔서 모시고 살 땐 삼시 세끼를 차리며 살았던 세월도 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살림솜씨는 점점 하강 중이라는 사실이다. 할 마음이 없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나의 주부력은 역할과 의무와 책임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자아였다. 지금도 여전히 살림을 하고 있지만 문제는 요리조리 다독이고 만들며 살아가는 일이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니 보람도 없고 먹고살아야 하니 그냥 하는 일인 것 같다. 세수와 양치질이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나에게 집안일과 요리는 그러한 것이다.


만약 생활에 여유가 넘쳐서 집안일을 모두 아웃소싱 한다면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을까도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답은 불만족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 내가 튀어나왔다. 늘 가족들을 위해 극강의 주부력을 쓰던 엄마와 할머니를 보고 자란 탓인 것 같다. 내 것이 아닌 나의 관념이 내 안에 있었다. 이럴 땐 참 무섭다. 무엇이 나를 만들어내었나 싶어서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늘 거기서 거기 같은 식재료들. 또 뭘 해 먹어야 하나, 이 재료로 뭘 해 먹을 수 있나, 궁리하고 생각해 내는 게 참으로 고역스럽다. 냉장고에 이런저런 재료들이 쌓여 있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다. 냉장고에 음식들이 꽉꽉 들어차있으면 풍족함을 느끼고 뿌듯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압박감을 느낀다. 


개념 없는 새색시 때 사들인 커다란 냉장고와 시어머니 마음대로 가져다 놓은 김치냉장고까지 나에겐 모두 골칫덩이다. 이런 나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들은 텅텅 빈 채로 제기능을 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냉동실은 꽉 채워져야 전기세도 덜 나간다던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냉장고 안에 있는 녀석들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기에.




2월 초부터 1일 1 과채식을 시작했다. 양배추, 당근, 사과 같은 단순한 재료 몇 개만 있으면 된다. 너무 편하고 좋다. 샐러드로 만들어 먹었다가, 쪄먹기도 했다가, 주스로 갈아먹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간편한 식사가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만들기도 편해서 너무 좋다. 그런데 이 식사는 늘 고독식사다. 나 혼자 먹는다. 나를 제외한 우리 집 남자 세 명은 엄연히 '식사'라고 불릴 나의 음식들을 '풀'이라는 단어로 부른다. 


"엄마, 오늘도 풀 먹어?"

"여보, 당신 오늘 아침엔 풀 안 먹지 않았어?"


그들은 나와 달리 꽉 찬 냉장고를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어쩌겠는가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그렇다고 이 어머니가 너희들을 굶기지는 않으니 그걸로 되었다. 


만약 이사를 가게 된다면 냉장고 사이즈는 무조건 축소하기로 혼자 결심한다. 나에게 무용한 것들을 데리고 서로 고통받으며 사는 것보다 정답게 어울려 살 수 있는 공생관계가 될 수 있는 아이와 사는 편이 낫다. 무조건 좋은 제품보다는 유용한 것들과의 만남이 살림에서는 이로운 것 같다.


작은 냉장고와 조우하는 미래를 그리는 동안 또다시 사회적 자아를 일으켜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엄마!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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