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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Feb 23. 2024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면 운명이 된다.

절대 부정은 절대 긍정이 되므로 주의바람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한 해 동안 진득이 친하게 지냈던 짝지가 있었다. K는 시크함과 함께 섬세함을 동시에 가진 친구였다. 수다스럽지 않으면서도 친밀감을 느끼게 했고, 여자이지만 의리라는 단어가 생각나게 하는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K와 나는 그때 둘 다 남자친구가 있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늘 서로의 남자친구에게 함께 편지를 쓰고, 기념일에는 함께 예쁜 선물을 만들었다. 워낙 친하게 지내던 친구이다 보니 K의 남자친구인 S와도 자주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편한 사이로 지냈다. 같이 만나는 날이 있으면 K에게 잘하라는 농담도 서슴없이 하며 이런저런 장난도 치면서 함께 놀았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문과, K는 이과계열을 택했다. 공부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만날 수 있는 계기도 없으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K와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S를 볼일도 없어졌다. 그러다 얼마 후 K와 S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듣게 되었다. 그렇게 추억은 과거로 자취를 감추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마침 카페에서 사람을 구하길래 친구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그 시절에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카페 입구에 서서 문을 열어주며 손님을 맞이했다. 카페를 들어서며 문 앞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저 아르바이트 면접 보러 왔는데요." 


나를 맞이하던 아르바이트생과 눈을 마주쳤다. 곧 우리는 서로에게 손가락을 치켜들며 "야, 너"라는 짧은소리와 함께 헛웃음을 지었다.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S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찾아갔던 아르바이트 장소에 S가 일하고 있었고, 몇 년 만에 만난 우리는 함께 일하는 동료 아르바이트생 사이가 되었다. 과거형으로 K의 남자친구였던 S는 현재형으로 내 친구 S가 된 것이다. 


고등학생 때 쿵짝 잘 맞게 장난치던 시절이 있어서 그랬던지 우리는 쉽게 다시 친해졌다. 일 끝나고 각자의 애인과 가는 모습을 보며 비웃거나 놀리기도 하고, 나는 커피바에서 S는 서빙을 하면서 실없는 장난을 치며 우정을 쌓아갔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둘 다 관두고도 우리는 종종 생각나면 만나서 맥주 한잔 하는 흔한 남사친, 여사친 사이가 되었다. 




"인마! 뭐하노, 행님 휴가 나오셨는데 빨리 안 튀어나오나"

"내가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진짜 니 같은 쓰레기랑은 결혼 안 한다 진짜."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S의 전화였다. 내 성별이 의심될 정도의 대화였지만 그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대화였다. 다소 과격한 대화는 우리의 친밀감이자 우정의 상징이었다. 말 한마디로 상처받고 관계가 틀어지는 여자들의 세상이 늘 답답했다. 그런 나의 숨은 털털한 성격에 자유를 주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분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제 정신 차릴래 따위로 우리가 나누던 상스러운 대화들은 모두 진심이었고 진실이었다.  


그렇게 S와 친구로 5년의 시간을 더 보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둘 다 옆구리가 비었던 시기가 있었다. 외로움이 자극한 바람이었을까 운명처럼 다가온 새로운 빛이었을까. 둘 다 어떻게 해서 그런 마음이 싹튼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절대'라는 나의 단어를 우주는 보란 듯이 묵사발 만들었다. 그때부터 사랑인지 정인지 모를 애매한 마음으로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친구였던 S와 남자친구인 S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에게 폭언 수준을 퍼붓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고 내가 늘 가슴속으로 꿈꾸던 배우자상인 만화 영심이의 왕경태 같은 사람이었다. 헤어지면 친구하나 버리는 셈 쳐야 된다는 기우는 사라지고, 어느덧 우리는 4년의 연애를 끝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S는 나의 신랑이 된 것이다. 


우리는 가끔 배우자와 과거 친구 사이를 오가며 사랑과 센 농담을 섞어 주고받는다. 지금 이 현실이 가끔 꿈같기도 하다. 우리가 우연히 카페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 각자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우연은 필연이었을까. 늘 가까이 있었지만 돌고 돌아 각자의 삶 앞에 서로가 서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연은 진짜 그냥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필연으로 만드는 일은 오직 나의 몫인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매일매일 수많은 우연들을 만나고 있다. 그저 스쳐가는 바람으로 여길 건지 나에게 다가온 소중한 인연으로 만들 것인지는 모두 나에게 달렸다. 내가 만드는 게 결국 운명이 된다.




(ps. 결혼 한 달 전 전화번호도 모르던 K에게서 문자가 왔다. S와의 결혼소식을 들었다고 축하한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이 기막힌 우연이 K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을까. K는 S의 친구와 친구여서 그 친구에게 소식을 들었다고 하니 참 그것도 우연한 일이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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