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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Mar 04. 2024

나무는 흔들리며 자란다.

나도 흔들리며 자란다.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지만 그 녀석들의 다가올 사춘기를 가끔 기대해 본다. 문을 닫고 동굴로 들어가는 스타일일까. 아니면 간섭 말라며 대들고 세상에 분개하는 스타일일까.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가장 두려운 건 싱거운 사춘기다. 내 맛도 네 맛도 모르는 그런 밍숭밍숭한 자아 찾기가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내 욕심이지 싶다. 




혹시 자신을 스스로 흔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영혼도 있는 걸까. 나는 사춘기가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치기로 방황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흔들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 같다. 뿌리가 깊고 튼튼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리는 게 두려워서 때때마다 동아줄을 부여잡고 버티고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나에겐 감히 흔들리고 방황할 여유가 없었다. 사춘기가 시작될 시기부터 나는 내 삶 대신 아빠의 삶을 붙들어야 했다. 아빠는 열심히 살아온 대가를 사별과 명예퇴직이라는 고통으로 돌려받았다. 무너지고 흔들리고 방황하는 아빠를 그냥 지켜볼 수 없어서 온 신경을 집에다 썼다. 아빠는 매일 술로 마음을 지웠고 우리 가족은 모두 아빠를 다잡기 바빴다. 딸 둘은 젊은 날의 치기를 부려볼 새도 없이 일찍 철이 들어야 했다. 




그런 나에게 마흔부터는 대놓고 흔들릴 자유를 주었다.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도 주고, 명치가 아파도 눈 크게 뜨고 화낼 자유도 주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의미한 짓이라 할지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가장 싫어하는 삽질도 팍팍해보게 하고, 무책임한 인간으로 살아볼 기회도 주었다.


아들러이론을 바탕으로 책을 쓴 기시미이치로는 우리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없다고 하였으나, 나에겐 미워할 용기가 없었다. 그게 뭐라고 그런 용기도 주지 못했다. 이해가 가지 않을 때마다 늘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병이 났다. 미움이라는 마음이 나를 흔드는 게 싫어서 나에게 기꺼이 미워할 용기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나 자신은 미워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런 내 마음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못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끊고 일 년 동안 자발적인 칩거를 하며 오로지 내 마음만 보려고 노력했다.


사람마다 삶의 여정이 다르니 방황의 시기도 각각 다를 수 있다고 여겨본다. 그냥 내 사춘기, 내 방황의 시기를 내 마음대로 지금이라고 정해 본다. 흔들리는 것도 큰 특권이라는 걸 생생히 느끼며 사는 요즘이다. 이래 봤다가 저래봤다가 하는 것도 재미다. 많은 흔들림 속에서 오히려 내가 공고해지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생생해지는 기분이다.


잘 살아야 되는 것을 강요받는 세상.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세상.

방황이 나쁜 것처럼 느끼는 세상.

좋은 사람, 좋은 삶만이 옳은 것처럼 여기는 세상.


그런 세상을 향해 이래야 되는 건 단 하나도 없고, 안 되는 게 어디 있으며, 무슨 기준으로 나쁘고 옳은 건지 당당하게 묻고 싶다. 잘 못살아봐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보고, 마음껏 흔들리면서 갈피도 못 잡다가 귀한 길 하나 내어보고, 기꺼이 방황하면서 나를 찾아가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나로, 좋은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살아가보자고 말하고 싶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자란다. 흔들리면서 뿌리가 더 튼튼해진다. 나의 이런 방황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 튼튼한 뿌리들이 어느새 줄기를 만들고 가지를 뻗어 푸른 잎사귀들을 피워낼 것이다. 그건 크기와 모양에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나무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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