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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배운 시간들

by 박순우

“ㅇㅇ야, ㅇㅇ야”

일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휴일 특유의 나른하고 고요한 적막을 가르고 할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빠를 부르는 소리였다. 할아버지는 살아있는 부처 같은 사람이었다. 한번도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방으로 갔다. 아빠, 엄마, 언니까지 온 집안 식구들이 몰려왔다. 할머니가 이상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셨고, 아빠는 계속 엄마를 부르며 할머니를 흔들었다. 할머니의 몸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이었다. 열일곱이었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살아 계셨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신도시로 이사를 온 지 이 년 가까이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조부모님은 익숙한 동네를 떠나는 걸 꺼려하셨다. 신도시에서 막 장사를 시작한 부모님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신도시 사람들로부터 구도심에 산다는 이유로 심한 무시를 당한 뒤 갑작스레 결정한 이사였다. 우리 네 식구가 먼저 이사를 했고 조부모님은 얼마 전 못 이기는 척 따라 오신 참이었다. 그런데 오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할머니는 고혈압, 당뇨 등 지병이 있었다. 늘 누워계셨고 자주 입원도 하셨다. 이사를 와서도 한동안 누워만 계셔서 제대로 이야기도 나눠보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웬일인지 몸을 일으켜 식탁에 앉아 계셨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셨다. 오랜만에 내 밥도 챙겨주시고 할아버지랑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셨다.


할머니는 낯선 아파트 숲으로 이사를 온 뒤 한번도 집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날 학원을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음식물쓰레기를 들고 따라 나왔다. 음식물 국물들이 바닥으로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밖은 이미 캄캄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짜증을 냈다. 할머니 국물 다 떨어지잖아. 밖이 이렇게 어두운데 길도 모르면서 어딜 나간다고. 내일 밝을 때 나가세요. 할머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춤거리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셨고 나는 학원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일찍 잠에 곯아떨어졌다. 할머니는 그날따라 아빠와 늦은 시각까지 오래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한다. 원래 일찍 잠자리에 드시던 분이 늦게까지 깨어 계셨던 것. 그렇지만 내게 남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음식물쓰레기를 들고 밖으로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엉거주춤한 모습이 전부였다. 할머니는 결국 집밖으로 한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 내내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죽음을 인지하자마자 아빠와 언니 그리고 할아버지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울음은 틀면 나오는 수도였다는듯 그렇게 서글프게 울었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말짱히 살아있던 할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거라고, 이렇게 빠른 시점에 가실 거라고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고작 십대 후반이었다. 죽음이 익숙할 리 없었다.


할머니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칠순을 조금 넘긴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그 시절에는 그 정도 나이의 죽음을 호상이라고 불렀다. 살아 생전 그렇게 엄마한테 시집살이를 시키더니 가실 때는 주무시다 조용히 가셨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을 했다. 가시기 전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잘해야 한다는 당부도 하셨다고 한다.


장례 내내 얼떨떨한 마음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나는 불구덩이로 할머니의 관이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아빠는 거의 실신할 정도였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리 가깝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꺼이꺼이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 나는 어른들이 가식의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어른들을 흘겨보며 나는 더 서럽게 울었다. 한 집에서 산 나보다도 더 슬피 우는 그들의 눈물은 진심이 아니라고, 어른들은 때로 슬퍼보이기 위해 거짓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고, 나는 그렇게 되바라진 생각들을 했다. 엄마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집에 돌아와 석달쯤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나를 아끼셨다. 그런 할머니가 죽어서 나를 해치지도 않을텐데 밤만 되면 이상한 공포가 밀려왔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리 식구들 중에는 아빠와 나만 이런 공포를 겪었다. 어른들은 가까운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으면 정을 떼려고 무서움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몇 달이 지난 뒤 이상한 두려움은 언제 그랬냐는듯 깨끗이 사라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4년 뒤 할아버지도 떠나셨다. 몸이 아픈 할머니를 위해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금세 기력이 쇠하고 치매를 앓으셨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다리가 풀린다는 게 어떤 건지를 실감했다. 간신히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오랜 투병 기간 때문인지 할아버지가 가셨을 때는 공포감이 몰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함께 살던 가까운 두 분을 모두 떠나보냈을 때 나는 고작 스물하나였다.


이따금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조금 더 사셨다면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것도 보셨겠지. 혹독한 시집살이를 한 엄마에게는 두 분의 이른 장례가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철부지 아빠에게는 두 분이 오래 사시는 게 조금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나에게도 조부모님의 사랑은 제법 무조건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말괄량이였던 나를 보면 늘 환하게 웃으셨고 이따금 은단을 한 알씩 나눠주셨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만두를 빚고 메주를 만들던 기억은 온화한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로 내게 남아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납골당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곳에 가면 어디선가 두 분이 지그시 미소 지으며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영혼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두 분이 나를 계속 지켜보셨으면 좋겠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어떤 간절한 순간이 찾아오면 두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 분은 내게 사랑을 알려주신 분이자 죽음을 가르쳐준 분인 것. 오랜만에 두 분을 꿈에서 뵙고 싶다. 뵌 지가 무척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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