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적어도 500자 이상은 쓰겠다 다짐한 지 8개월
언어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면 글태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머릿속에 문장들이 떠올라도 붙잡아 문자화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그저 흘려 보낸다. 이런 공허는 글을 읽고 쓰면서 이따금 느껴지는데, 글을 쓰다가 매번 같은 말을 한다고 여겨지거나 나열해야 할 생각이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그러면 글다운 글을 쓰지 못하고 방황하고 만다.
매일 적어도 500자 이상의 글은 쓰겠다 다짐하며 살아온 지 8개월. 공개하지 않아도 어딘가에는 내 글이 쌓여간다. 에세이만 쓰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글을 쓰다보니 나는 대체 세상에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책을 낸다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글쓰기를 찬양하는 글을 써볼까. 내 삶의 궤적을 가감없이 적어내려가는 논픽션을 써볼까. 단상들을 적은 에세이들을 묶어볼까. 생각은 많고 어느 것 하나 붙잡지를 못한다.
명함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당장은 카페 주인이지만,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일정하게 일직선으로 그을 수 있는 선이 없다. 내 삶의 선들은 삐뚤빼뚤 위아래로 요동치듯 오르락 내리락거린다. 일반 회사를 다니다가 기자가 되었다가 때려치고 여행을 다니다가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갑자기 바리스타가 되었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만한 이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는 가운데 그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선이 있다면, 그나마 글을 써왔다는 것. 논술, 일기, 기사, 에세이 분야는 다르지만 글을 쓰긴 했다는 것.
어제 우연히 보물을 찾았다. 9년 전 메일을 찾아야 할 일이 생겨서 각종 스팸메일을 지우고 지우다 보니 그 안에 보물이 남아 있었다. 다이어리 어플에 기록해 갔던 긴 여행을 떠나기 전의 기록과 길 위에서의 기록, 그리고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홀로 방황하던 시절의 기록까지. 언젠가 내 메일함으로 보내두었던 게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메일을 찾고 너무 기뻐서 방방 뛰고만 싶었다. 싸이월드에 간간이 적어둔 기록들이 복원되지 않아 속상해하던 참이었다.
메일을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불완전한 기억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는 너무나 익숙한 문장들도 많았지만,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한 에피소드들도 적혀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감정들, 태풍으로 여행이 미뤄지면서 드러난 엄마의 미세한 감정선들, 그 여행 위에서 순간순간 느낀 내 마음의 변화들까지. 그리고 그 여행을 계기로 완전히 다르게 살기 시작한 내 삶까지.
정리되지 않고 두서없이 적어내려간 글들을 보면서 스물아홉, 서른 무렵 외로운 길에 홀로 서있던 그때의 나를 오롯이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객관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상황이나 감정들을 서술하지 못하고 함축한 시 형태로 드러낸 적도 많았다. 그때 담담히 적어내려갔던 시들을 보면서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세게 안아주고 싶었다. 외로워하지 말라고, 용기내어 걸어가는 그 길을 의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떠났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큰 결심을 해줘서 참 고맙다고. 정말 오래오래 그때의 나를 안아주고 싶었다.
밤부터 거세게 하강하던 빗줄기가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다. 장마라더니 며칠 하늘은 잔뜩 꾸물거리기만 하고 시원하게 쏟아내질 못했다. 그러다 결국 새벽부터 강한 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 글은 비의 힘으로 써내려 가는 것. 아직 객관화하지 못해 나를 괴롭히는 일련의 일들과 갑자기 내 삶에 선물처럼 찾아온 오래된 기록과 앞으로 내가 써가야할 이야기들을 되뇐다.
명확해지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글을 써도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써내려간 스스로를 토닥인다. 뭐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특별해지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이 길에 들어선 이유는 단 하나,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었으니. 후회하지 않을 때까지 쓰고자 했으니. 이렇게 써지든 써지지 않든 지치지 않고 쓰고 있으니. 그걸로 족하다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글다운 글이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우연히 발견한 보물처럼 언젠가 이 글도 미래의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 될 수도 있으니. 오늘도 이렇게 글을 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