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만 작법책은 보지 않는다

내가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꾸준히 하는 일

by 박순우

에세이가 가장 자신있는 글쓰기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이제껏 에세이 작법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에세이 쓰기 수업도 하고 있으니. 내게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수시로 스스로에게 던진다. 나는 과연 자격이 있을까. 에세이를 쓸 자격, 에세이 쓰는 사람들을 도울 자격, 그런 자격은 누구로부터 부여받는 것일까.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 형식이랄 게 따로 없는 게 에세이라고 믿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형식이라 함은 나 혼자 보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처음 컴퓨터 앞에 앉아 내 이야기를 글로 옮길 때부터 나는 일기가 아니라 에세이를 썼다. 이십 년쯤 전의 일이다. 까닭은 일기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해야만 글이 써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나는 작가도 아닌데, 독자가 있다고 상정해야 비로소 글이 써졌다.


이런 특이한 습성 때문에 내 글이 정말 보잘 것 없을 때부터 나는 글을 누군가에게 공개해왔다. 처음에는 SNS를 구독하고 있는 소수의 친구들이 내 독자였고, 점점 불특정 다수로 독자의 폭을 넓혀갔다. 에세이 작법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글쓰기를 독려하는 책은 종종 보았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아 보자면, 마루야마 겐지님의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님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강준만님의 <글쓰기가 뭐라고>, 장강명님의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이다.


이런 책들을 읽은 건 글쓰는 방법을 익히기 위함은 아니었다. 작가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몇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책을 참고했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 같다. 내 의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내가 작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맞는지, 기성 작가들은 어떻게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지, 나는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좋은 글은 무엇인지. 나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했고, 이런 책들을 통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매일 글을 썼다. 얼마 전부터는 글을 쓰려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고.


에세이를 쓰면서도 에세이 작법 책을 보지 않은 이유를 돌아본다. 나는 틀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거나, 에세이에는 이런 것들을 꼭 담아야 한다는 생각들을 내 안에 주입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만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작법책을 보는 대신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시로 내 자신에게 던졌다. 내가 생각한 '좋은 글' 안에는 흔히 말하는 문법에 맞는 올바른 표현 같은 게 들어있지 않았다. 오직 진심과 솔직함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그런 글에는 힘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세상을 흔드는 힘.


작법을 보는 대신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믿으니, 내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매 순간 매 고비마다 나를 돌아보았다. 글을 공개하는 일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솔직한 나를 담는 글인데, 발가벗겨진 나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례로 브런치에 쓴 첫 글이 포털에 걸리면서 조회수가 8만 건에 육박하고, 댓글이 수십 개에 달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몇 개월동안 두려움에 글을 쓰지 못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걸. 그 뒤로 또 한참동안 나는 내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드러냄으로써 벌어지는 모든 일에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나는 작법보다 그런 것들에 더 오래 매달렸다.


아내, 엄마, 바리스타 등 역할이 많은 사람이다보니 매일 쓰는 습관을 들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기성 작가들은 루틴이 정해져 있어 아침 운동을 마치고 글이 써지든 써지지 않든 일정 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런 방식이 맞지 않았다. 매일 카페 문을 열다보니 아침에 책상 앞에 앉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늦은 밤에라도 앉아보려 했지만 체력이 달려 잠이 들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글 쓰는 도구로 노트북에 핸드폰을 추가했다. 도구를 바꾼 뒤 나는 언제 어디서든 글을 썼다. 메뉴를 제조한 뒤에도, 밥을 하다가도, 자다 깬 새벽에도, 이동 중에도, 나는 글을 썼다.


틀에 갇히려 하지 않으니 오히려 다양한 글을 쓸 수 있었다. 주로 에세이를 썼지만, 사회 현안에 대한 칼럼 성격의 글이나 분석글을 쓸 때도 있었다. 나는 마흔을 넘겼지만 여전히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늘 새로운 꿈을 꾸고 죽는 날까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과거는 내게 가장 후회되는 일이므로 나는 이제 더는 지체할 수가 없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늘 글을 쓴다. 죽기 전에 무얼 할 것이냐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게 글이었으므로, 나는 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까지 스스로 찾은 '쓰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매일 읽고 쓰는 것,

그냥 쓰는 것,

세상에 늘 관심을 두는 것,

오감을 열어 세상을 관찰하고 느끼는 것,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몸은 늙되 생각은 결코 늙지 않는 것.


여기까지 깨닫고 나서 내가 내린 결론은, 결국 쓰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와도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당히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 스스로를 늘 다잡아야 했다.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글이 나오니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고난이 닥치면 자기 연민에 빠질 때도 종종 있지만 그럴 때마다 모든 상황으로부터 객관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 쓰는 것 자체를 사랑해야 했다. 내 글도 사랑해야 했고.


그렇게 나는 작가의 삶으로 간다. 내가 깨닫고 정한 나만의 방식으로 쓰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작가가 되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 깨달은 것들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글을 쓰는 일 못지 않게 돕는 일을 사랑한다. 하면 할수록 보람을 느끼고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미래가 그 곳에 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그저 쓴다. 내가 온전한 내가 될 때까지, 내가 자라는 만큼, 내가 느낀 만큼, 내가 도달한 생각의 깊이 만큼, 나는 쓴다. 작법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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