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Jun 27. 2022

너와 나의 꿈은 ‘멋진 아저씨 멋진 아줌마’

여섯살 난 둘째작은 체구와는 다르게 이미 세상을  아는 것처럼  때가 많다. 표정도 말투도 제스처도 어른스럽게 모든 게 익숙한 것처럼. 그럼에도 아직은 작고 작아  표현들이 오히려 웃기고 귀여울 때가 많은데, 그런 모습을 보고 첫째는 둘째가 잘난 척이 심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묻는 ,


“너 멋진 아저씨 되고 싶어서 그러냐?”


멋진 아저씨라는 단어가 너무 재밌어서 한참 웃었다. 아줌마, 아저씨는 분명 세상에 필요한 단어지만 어딘가 훼손된 느낌이 강한데, 궁극적인 목표지점이 ‘멋진 아저씨라고 하니  소박함과 진지함이 귀엽기만 했다. 아이들 머릿속의 멋진 아저씨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놀이공원 대관람차 안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먼산을 바라보는  작은 영혼의 모습이 혹시  아이만의 ‘멋짐 걸까.


너의 멋짐이란 이런 것


내 생애 첫 바이킹을 탔던 날을 명확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고 막내삼촌이 언니와 나를 데리고 롯데월드에 갔다. 부모님은 우리를 그런 곳에 데려간 적이 없었으니 그날이 내 생애 첫 놀이공원 방문이었던 것. 그날 바이킹을 탔다. 그게 뭔지도 어떤 느낌인지도 모른 채 겁없이 삼촌 옆에 올라탔다. 가운데 자리였는데도 나는 타는 내내 오금이 저려 부들부들 떨다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살면서 바이킹을 몇 번이나 탔을까. 수많은 경험에도 그날의 첫 느낌은 여전히 내 안에 선명하다. 처음이란 그런 것.


어제 첫째가 겁없이 외부 바이킹을 타겠다고 하기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함께 올라타 내내 첫째의 표정을 살폈다. 작고 그네 수준인 내부 바이킹을   타봤기에 첫째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의기양양했다. 점점 각도가 높아지고  역시 긴장이  무렵 옆을 돌아보니 첫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차마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낯선  느낌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내가 해줄  있는  팔을  잡아주는 것뿐. 그리고 펑펑 울던 어릴  나를 소환해 울지않고 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치켜세워주는 것뿐.


바이킹을 내려오고 나서도 첫째는 오래오래  느낌에 대해 이야기 했다. 오늘 아침까지도. 내게  바이킹 타던 날이 그렇듯 아이에게도  순간은 잊히지 않겠지. 처음 제대로 바이킹을 탔던 여덟번째 생일 무렵이 그렇게 각인되겠지. 둘째는 아직 키가 작아 타지 못했는데, 다음에는  타겠다 다짐을 했다. 별 것 아니라며. 그때 어른들의 멋짐을 아는 둘째는 과연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그나저나 나는 그때도 아이들과 함께 바이킹에 몸을 실어야 하는구나. 엄마는 이제 놀이기구 타는  너무 힘든데


아이들이 커간다. 자신들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할  있게  아이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쌓여간다. 기억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언어가 제대로 자리 잡혀야 기억도 언어와 함께 뇌에 새겨지는 . 아이들에게 잊을  없는  경험들이 하나둘 더해 간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는 아주 조금씩 거리를 둔다. 너희들만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나는 그저 조연으로 머문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다. 울어도 웃어도 고집을 부리고 불만을 얘기해도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들.


작은 영혼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습은 늘 감동이다. 아픔과 기쁨, 슬픔과 억울함 등을 느끼면서 그렇게 아이들이 조금씩 스스로가 되어간다. 덕분에 지근거리에서  인간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 나도, 여전히 불완전한  역시, 완전한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수가 없다. 너희들 덕분에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너희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이니.


그러고보니 나의 궁극적인 목표도 ‘멋진 아줌마’였다. 훼손된 이미지를 지우고 본래의 정의에만 집중해 단어를 들여다본다. 아저씨 아줌마. 그러고보니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구나.


멋진 아저씨 멋진 아줌마.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성에 대해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