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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un 04. 2022

사회성에 대해 생각한다

사회성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하려고 하는 인간의 근본 성질. 인격, 혹은 성격 분류에 나타나는 특성의 하나로, 사회에 적응하는 개인의 소질이나 능력, 대인 관계의 원만성 따위'가 사회성이다. '부모의 사회성이 떨어지면 자녀의 사회성도 떨어진다'는 제목의 글을 읽고 나는 몸과 마음이 못내 불편했다. 나는 사회성이 별로 좋지 않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 나쁜 걸까. 아무리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지만, 모든 사람의 사회성이 좋을 수 있을까.


이 글이 불편했던 건 사회성을 마치 인간이라면 꼭 가져야 하는 능력으로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사회성은 꼭 좋아야 하는 걸까.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설 곳은 이 사회에 없는 걸까. 내게는 이 전제가 마치 외향적 인간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닮아있다고 여겨진다. 내향적인 성격을 단점으로 보고 외향적으로 바꾸어가라고 말하는 사람들. 왜 우리는 굳이 성격을 바꿔야 하는 걸까. 그저 타고 태어난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손석구가 연기한 구씨는 사람이 정말 싫다는 말을 한다. 아침에 눈만 뜨면 떠오르는 사람들 때문에 머리가 너무 복잡해 술에 의지하게 됐다고 말한다. 김지원이 연기한 염미정 역시 인간으로부터 관계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한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건 인간이지만, 인간을 가장 인간답지 않게 만드는 것 또한 나와 같은 인간이다. 사회성이 좋든 좋지 않든 우리는 같은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같은 사람으로부터 치유도 받는다. 후자만 있다면 인생이 편하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후자보다는 전자를 만나는 일이 더 많다. 맞지 않는 사람도 꾸역꾸역 만나야 하는 일상. 우리는 그런 일상을 견디며 돈을 벌고, 밥을 먹는다. 


대학 시절 나는 사회성이 좋았다. 소위 인싸였다. 단대, 과, 동아리 활동까지... 교내에서 할 수 있는 대외 활동 중 웬만한 건 다 하며 지냈다. 사람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 사회성에 의문을 갖게 됐다. 원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웃어야 하는 날들이 쌓여갈수록 나는 나로 살 수 없었다. 나보다 윗 사람이라는 이유로 옳지 않은 주장을 해도 고개를 숙여야 했고,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도 잘 어울려야만 했다.


상사에게 옳지 않다고 대들거나, 당신은 나와 맞지 않으니 일 외의 것으로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상사에게 찍혀 괴롭힘을 당하거나, 다른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속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겉으로는 웃다보니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사회부적응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는 걸 잘 못하는 사람, 옳지 않은 일은 아무리 강압적인 상황에서도 하기 힘들어하는 고지식한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정말 사회부적응자였을까. 오히려 사회가 나를 부적응자로 만든 건 아닐까.


불편한데도, 옳지 않은 걸 아는데도, 사회생활을 잘 하기 위해 맞춰가야만 하는 게 우리 주변에는 참 많다. 사회 자체가 옳지 않은데도 차마 반기를 들지 못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흐르는 분위기에 따라 살아가는 삶. 밥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인생들이 모두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견뎌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사회는 굴러간다. 다만 그런 삶과 태도가 옳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옳고 그른 게 아니라 그저 다른 건 아닐까. 누군가는 견딜 수 있지만, 누군가는 견딜 수 없는 것. 그저 서로 다르기에 견딤의 정도가 다른 것. 그게 결국 우리가 말하는 사회성은 아닐까. 


나는 혼자가 편하다. 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사람 만나는 걸 이전에는 즐겼지만, 지금은 서로 많이 아끼는 소수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더 선호한다. 함께 하는 작업보다 혼자 하는 일에서 더 큰 성취감과 만족을 느낀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자란 환경과 사회의 영향 때문에 바뀐 건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외향적 인간에서 내향적 인간으로 바뀌면서 깨달은 건, 인간은 모두 다르다는 것, 그리고 각자가 설 자리는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외향적 인간이 살아가기에 더 알맞는 공간이 있듯, 내향적 인간에게 맞는 공간도 이 세상에는 분명 있다. 사회성 역시 마찬가지. 사회성이 좋은 사람들이 필요한 곳이 있듯,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공간 또한 존재한다. 어느 게 더 우월한 게 아니라, 그저 다른 것뿐.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하거나 옳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반대인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게 지나치면 자신의 생김을 미워하는데 이르기도 한다. 나로 살 수 없는 사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현할 수 없는 사회는 지옥이 아닐까.


사회성은 인성과는 다르다. 둘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회성은 사람과의 어우러짐을 즐기고 잘 하는 능력이지만, 인성은 사람의 성품을 가리킨다.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인성이 나쁜 건 아니다. 반대로 사회성이 좋다 해서 인성이 좋다고 볼 수도 없다. 살면서 사회성이 좋다 못해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다. 그런 사람들은 인성은 나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사회성은 떨어지지만 인성이 좋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벌이는 사람들도 많다. 누구의 인생을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세상 모든 건 상대적인 게 아닐까. 절대적인 영역의 것은 얼마나 될까.


남편과 나는 모두 사회성이 떨어진다. 개인주의자이며,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한다.(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그렇다고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자주 만나는 걸 꺼릴 뿐, 가끔 좋아하는 지인을 만나면 누구보다 즐거워한다. 아이들이 우리 부부를 닮았다면, 아마 사회성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며 다그치고 싶진 않다. 사회성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런 아이가 설 자리가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회성이 떨어지더라도 마음을 나눌 사람들을 자라면서 분명 하나둘 사귀어 갈 거라 믿는다. 사회성은 인간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므로. 아이들이 자신의 생김대로 살아가도 되는 그런 세상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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