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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 어느 게 더 무서울까

이제는 비가 좀 그치기를

by 박순우

아주 오래 전 내가 꼬마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열 살 정도 됐을까. 그날도 아마 요즘처럼 비가 많이 왔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는 홍수로 지붕위에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둥둥 떠내려가는 개 소 돼지들, 배를 타고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 수해 복구 현장에 투입된 군인 등이 나오고 있었다. 그 시절 홍수가 나면 어김없이 뉴스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했다.


나는 그때 함께 뉴스를 보고 있던 할아버지께 물었다.

“할아버지 불이 더 무서워요? 아님 물이 더 무서워요?”

할아버지는 대답하셨다.

“물이 더 무섭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다시 물었다.

“왜요?”

할아버지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미소 지은 얼굴로 바라보며 대답하셨다.

“불은 타고 난 자리라도 남지만, 물은 자리가 남지 않아. 모두 쓸어버리니까.”


그 말은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뉴스에서 봤던 큰 불이 난 현장의 참혹한 모습들과 큰 비가 내린 뒤 홍수로 인해 모든 게 쓸려내려간 마을의 모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물과 불, 잘 사용하면 무엇보다 유용하지만 잘못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운 존재. 어린 시절 어른들 틈에 껴서 자주 뉴스를 보았고 그때마다 사고 현장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여름에는 주로 물로 인한 피해가 많았고, 겨울에는 불로 인한 사고가 잦았다.


비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어릴 적 비만 오면 신발과 양말을 벗고 골목길을 흘러내려가는 물길 속을 첨벙이며 놀았다. 처음에는 아무리 비가 와도 학교로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는 바쁜 엄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비를 흠뻑 맞았고, 맞다보니 재미가 있어 부러 더 맞으며 놀곤 했다.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 적도 많았다. 거실 창에 대롱대롱 매달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비 내음과 빗소리가 좋아서이기도 했고 졸졸 시냇물처럼 물길이 되어 떠내려가는 빗물을 바라보며 이 많은 물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고민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은 지대가 좀 높은 곳에 있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집이 물에 잠길 염려는 없었다. 비가 많이 내릴 때면 그 사실에 안도하곤 했다. 이모네 집은 지하실이 물에 잠겨 이모와 이모부가 물을 퍼내느라 고생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니까.


운이 좋았던 것인지 선견지명이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살았던 집들은 모두 어느 정도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자리잡은 섬의 집도 마을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에 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비는 졸졸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화산섬이라 지반의 특성 때문에 홍수가 잘 나지 않는 점도 있다.


반면 바람은 늘 문제가 된다. 지대가 높으면 비는 무섭지 않지만 바람은 더 거세게 분다. 섬의 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겁 없이 자리를 잡은 우리 부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태풍이 올 때마다 다른 집보다 더 강한 바람이 부는 위치 때문에 몸을 움츠리곤 한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이 태풍 때문에 가장 두려운 계절이 된 건 섬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였다.


비가 내리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홍수가 날 정도로 내리는 비를 보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이런 재해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기에. 오래 전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물은 때로 무섭게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을 쓸고 가 버린다. 자리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흙탕물로 자리를 훼손한 채 그렇게 빠져버리는 게 바로 물인 것.


코로나도 간신히 지났는데 폭우로 당장 장사를 할 수 없게 된 상인들을 보면서 같은 자영업자로서 남일 같지 않아 마음이 더 착잡하다. 손댈 곳은 많은데다 며칠간 벌이까지 없으니 얼마나 가슴이 무너질까. 예기치 않은 역병으로 삼 년간 힘겹게 버티고 버텨 이제야 다시 좀 장사를 해보겠다고 마음 먹은 이들에게 폭우로 인한 피해는 얼마나 뼈아플까. 간신히 몸을 일으킨 사람을 다시 쓰러뜨리는 모진 비로 여겨지지 않을까.


며칠 땡볕만 내리쬐는 남부지방에서 연일 뉴스만 뒤적이며 애를 태운다. 이제는 좀 그만 왔으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쨍하고 해뜰 날이 다시 찾아왔으면. 악몽이 얼른 끝이 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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