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이 낯설다

by 박순우

이름이 낯설어지고 있다. 실명이 아니라 필명인 박현안이란 이름이.


막연하게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 필명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고민한 적은 있지만, 막상 내가 직접 내 이름을 짓자니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프로젝트 얼룩소를 알게 되고 활동을 위해 가입절차를 밟게 되었다. 얼룩소는 실명활동을 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실명은 워낙 흔치 않은 이름이라 쓰는 게 좀 꺼려졌다. 좀 더 자유롭게 글을 쓰려면 실명 같은 필명이 필요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아이들 이름이 떠올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상 가장 소중한 아이들. 아이들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내 이름을 만든다면 의미도 있고, 필명이지만 아이들이 담겨있다는 생각에 글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질 거란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박현안이 되었다. 급조한 것치고는 제법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그 필명을 사용한 지 다음달이면 어느덧 일 년이다.


처음의 낯설음도 잠시, 필명은 점점 익숙해져 갔다. 얼룩소는 소통이 많은 공간이고 마침 카페가 비수기라 글도 많이 쓰고 활동을 많이 하다보니, 여기저기서 나를 현안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오프라인으로 사람을 만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대신 글을 쓰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다보니, 실명보다 필명으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점점 박현안이 되어갔다. 실명 같은 필명이었다.


섬에서 카페를 운영하다보니, 카페 이름을 알게 된 몇몇 친한 얼룩커들이 나를 보러 섬으로 날아왔다. 말보다 더 밀도 있는 서로의 글을 보며 친해진 사이다보니 내적 친밀감은 쌓일대로 쌓여 있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를 현안님이라고 했다. 내 실명을 알게 되어도 필명에 익숙해져 모두들 나를 현안으로 불렀다. 실명은 아니지만 불리는 시간이 더해지자 내 스스로가 점점 더 박현안이라는 옷에 몸이 맞아가는 듯했다.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 자주 끼적이는 나를 보면서 아이들도 자연스레 박현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첫째가 물었다. "엄마, 박현안이 누구야?" "엄마가 글 쓸 때 쓰는 이름이야. 글 쓸 때 사용하는 이름을 필명이라고 해. 너네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현안이 되었어." "나도 그런 것 같았어!" 아이들은 엄마의 필명에 자신들이 박혀 있는 게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도 박현안이라는 필명은 자연스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얼룩소 활동을 그만 두고도 나는 계속 박현안으로 불렸다. 얼룩소 인연들과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불리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따금 한번씩 불리는 정도라고나 할까. 브런치는 상호간 소통이 활발한 곳은 아니다보니 똑같이 박현안이란 이름으로 글을 쓰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 얼룩소 활동을 멈춘 지도 두달 보름 가량이 지났다.


오늘 한 얼룩커분이 톡으로 나를 현안님이라 부르는데 갑자기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온전한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 느낌이 나를 휘감자 좀 서글펐다. 이어지는 긴 상념들. 왜 서글플까.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나는 여전히 박현안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불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나다워진다고 느끼는데, 박현안은 내가 제일 나일 때의 이름이었던 것. 그 이름이 낯설다는 건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의미인 것만 같았다.


이름은 무엇일까. 이름은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존재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명칭이 아닐까. 실명은 태어나서부터 줄곧 불려왔으니 한동안 불리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익숙한 완전한 나의 것이다. 하지만 필명은 다르다. 쓰지 않는 한 필명은 내 것일 수 없다. 사용하지 않으면 필명은 허공의 잡히지 않는 구름과 같다. 슬럼프에 빠진 지 열흘쯤이 흘렀다. 그동안 쓰지 않은 건 아니나 쓰는 게 여전히 버겁다. 얼룩소가 좀 그리운 것도 같다. 소통을 빼고 '쓴다'는 지극히 고독한 행위를 지속하는 게 때로 벽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막막하다. 얼마 전 모임 글감으로 집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얼룩소는 내게 글쓰는 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전히 애증의 공간인 곳.


어떻게든 쓰려 하고 있으니 슬럼프는 언젠가 극복될 것이다. 그제보다는 어제가,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래도 조금 낫다고 느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나는 다시 박현안이라는 이름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그저 급조한 필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나는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와 박현안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박현안이라는 이름을 퍽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짐작보다 훨씬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다시 박현안이라는 이름의 옷을 내 몸에 꼭 맞게 걸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박현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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