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보다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
나이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들 말한다. 10대는 10km의 속도로, 20대는 20km의 속도로, 60대는 60km의 속도로...... 어른들의 말은 때로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듣기 힘들 때도 있지만, 정말 들어야겠다 싶을 만큼 딱 떨어질 때도 참 많은데, 내게는 이 말이 그랬다. 분명 지구는 늘 같은 속도로 자전을 하지만, 나이가 차오를수록 내가 느끼는 체감 속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인간의 뇌는 시간을 사건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과학자가 아니라 적확하게 표현하기는 좀 어렵지만, 대략 설명하자면 하루에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많을수록 시간을 길게 느낀다는 것. 반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생활이 반복되면 하루가 짧게 느껴진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시간을 길게 느끼는 건 왕성한 호기심과 활동량으로 그만큼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인 것. 나이가 들수록 일상은 특별함이 없이 고정되어 반복되다보니 시간을 더 짧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카페에 틀어박혀 손님을 치르고 메뉴를 만드는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다 연휴를 맞이하니 시간은 꽤 길게 느껴졌다. 문제는 긴 시간을 감당할 체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 연휴 내내 어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몸은 자꾸 지쳐만 갔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이동을 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걷고 맛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들은 참 소중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쉬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일상이 그리웠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울리는 알람을 들은 뒤 몸을 일으켜 아이들을 흔들어 깨우고, 대충 밥을 챙겨 먹은 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씻고 옷을 갈아입고 둘째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며 손가락 하트를 열번쯤 날려주고, 자신의 몸보다 큰 가방을 메고 킥보드를 타고 날아가며 "안녕 나의 웃긴 엄마"를 외치는 첫째에게 "안녕 나의 웃긴 아들"로 화답하고, 집안일을 좀 하다 오픈시간이 돼 카페 문을 열고, 손님을 치르며 중간중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늦은 오후 아이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나도 카페를 마감하고 아이들 간식을 챙기고 알림장을 들여다보며 잠시 쉬어가고, 어둑해지면 밥을 안치고 두세 개의 반찬을 새로 만들고 남편이 돌아오면 네 식구 둘러앉아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며 밥을 먹고, 숙제도 하고 놀이도 하고 책도 보다 씻고 함께 잠자리에 드는 그렇고 그런 일상.
내가 나의 일상을 사랑하는 건 별 것 아닌 나의 하루 안에는, 찰나로 흐르곤 하는 나의 하루 안에는, 내가 선택하고 일군 것들이 촘촘히 박혀 있기 때문. 내가 결혼한 사람과 내가 선택해 낳은 아이들과, 내가 선택해 문을 연 카페와, 내가 살고자 해 쓰기 시작한 글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나의 일상은 짧고 반복적이지만 내가 선택하고 이룬 것들이기에 내게는 꼭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때로 예상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버거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의 시간을 들이고 나의 체력을 소진한다.
연휴 내내 그 일상이 그리웠다. 특별할 건 없지만, 그 안에서 엄마와 아내와 바리스타로 살다 또 틈틈히 글을 읽고 쓰며 내가 되는 시간들도 채워넣는 나의 일상 나만의 하루. 나는 여전히 일상이 일생이라는 말을 믿는다.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변치 않을 일상이라면, 연휴에도 오히려 그리운 일상이라면, 그 일상은 꽤 괜찮은 꽤 잘 살고 있는 인생이 아닐까. 때문에 살다가 문득문득 일확천금이 주어진다 해도 내 일상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하루하루가 모여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고,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 그런 실낱같은 하루하루들이 쌓여 나는 어느덧 마흔 초입이 되었다. 내 안에는 수많은 하루하루들이 쌓여있고, 오늘의 하루는 어제의 하루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하루다. 반복은 반복이지만, 반복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그런 반복이 결국 나를, 나의 삶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나의 일생이 되어간다.
돌고 돌아 다시 일상이다, 드디어. 반갑다 나의 하루. 너무나 소중한 나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