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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자아를 가진 사람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공존한다

by 박순우

한때 나는 내가 신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누군가 들으면 박장대소부터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이야기는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십대까지 이어진 생각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게 된 건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안에 살았던 두 개의 자아 때문이었다.


내 안에는 늘 두 명의 내가 있었다. 하나는 밥을 먹고 학교를 가고 일상을 살아가는 그저 평범한 한 아이로서의 나, 즉 남에게 ‘보여지는 나’이다. 또 하나는 그런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세상과 스스로의 상황을 명확히 판단하려는 ‘바라보는 나’이다.


일상에서는 주로 평범한 전자의 내가 나오지만, 고요가 찾아오면 나는 늘 후자의 내가 되어 세상과 그 세상 속의 나를 굽어보곤 했다. 후자의 나로 있다보면 세상은 기이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왜 세상을 이런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을까.


고요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문은 커갔지만, 아무에게도 이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게 누구라 한들 나를 비웃을 게 뻔하므로. 나이가 어려 쓸데없는 공상이나 한다고 구박받을 것만 같았으므로. 내가 가진 고민이 비정상이라 치부당할 게 당연했으므로.


시간이 한참 흘러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을 읽은 뒤 이런 고민을 나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소설 속 주인공인 열두 살 진희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라는 표현으로 이 둘을 갈라 설명하고 있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한다. <은희경, 새의 선물, p12>


어릴 때에 비해 십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보여지는 나’가 도드라지면서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나’는 그 역할이 줄어들었다. ‘바라보는 나’가 작아지니 ‘보여지는 나’는 자꾸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타인의 말에 현혹되곤 했다.


‘바라보는 나’가 다시 전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건 이십대 후반이었다. 현실이 힘들수록, 세상이 옳다는 방향에 의문을 갖는 날들이 많아질수록 나는 점점 ‘바라보는 나’를 소환했다. ‘보여지는 나’가 과연 잘 살고 있는지, 보이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진짜 나를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가름을 하기 시작한 것.


많은 방랑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거의 일치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보여지는 나’로만 살다 홀로 스스로에게 집중할 때에만 ‘바라보는 나’를 꺼냈다면, 지금의 나는 매 순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교차하며 살고 있다. 소설 속 문구처럼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어떤 상황에 있든 두 개의 자아로 있다보니 장점과 단점은 동시에 찾아왔다. 장점은 상황에 침몰되지 않고 언제든 의지를 가지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깊은 슬픔에 빠져 있어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스위치를 끄듯 눈물을 뚝 그칠 수 있었다. 슬픔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비교적 평정심을 잘 유지하게 된 것.


단점은 ‘바라보는 나’가 강해질수록 스스로가 인간답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분노도 사랑도 슬픔도 나는 남보다 빠르게 딛고 일어나게 되었다. 누구보다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상황과 마음을 판단하는 게 하나의 버릇처럼 굳어진 것. 결과적으로 나는 남보다 적게 분노하고 적게 사랑하며 적게 슬퍼하고 있었다. 인간다운 삶이라기에 그 온도는 너무나 차가웠다. 이런 자신이 싫어 때로는 ‘바라보는 나’를 부러 잊고 상황에 푹 빠지려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어릴 때는 혼란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특이점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 ‘보여지는 나’로만 살았다면 타인의 길이 내 길인양 받아들이며 수동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바라보는 나’가 있었기에 세상 모든 것들을 뒤집어볼 수 있었다. 그게 과연 내게 맞는 길인지를 수없이 되물었던 것. 순간 순간은 힘겨웠지만 돌이켜보면 ‘바라보는 나’가 늘 내 안에 있었기에 조금 늦거나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나만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두 개의 자아는 글쓰기에도 무척 도움이 된다. 현실의 고통에 빠져있다가도 금세 ‘바라보는 나’가 나타나 ‘보여지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글을 쓰게 만든다. 내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다는 건 결국 객관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객관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습관이 되어버린 이런 객관화는 내 삶 전반을 지배한다. 이어서 내 글쓰기에까지 옮겨간다. 글은 곧 객관화이기도 하니 이런 습관이 적잖은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이런 모습이 타고난 행운으로 보이다가도 종종 소름이 돋는다. 삶을 온전히 느끼는 게 아니라 매사에 삶을 판가름하려 하기에 때때로 스스로가 인간답지 않게 느껴지는 것. 조금 좋게 포장하면 작가적 근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보다는 인간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내게 이런 객관화는 때로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나의 자아분열은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보여지는 나’도 ‘바라보는 나’도 모두 나이기에, 나는 인간다운 나도 인간답지 않은 나도 모두 껴안고 살아갈 것이다. 다만 사람을 마주할 때는 좀 더 인간다운 나를 꺼내고, 글을 쓸 때 역시 인간다움을 넣을 수 있는 나이기를 바란다. 결국 글을 쓰는 것도 인간답게 살기 위함이므로. 글이 사람을 앞서지는 않기를, 사람이 먼저인 삶이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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