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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Sep 27. 2022

그저 나라는 이유로

수식어가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수식어가 없는 사람이고 싶다.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지역도 학벌도 없는 사람. MBTI 같은 각종 지표나 OO대학 출신과 같은 갖가지 스펙으로 어림 잡아 짐작할  없는 사람. 그런 것들은 나를 설명하기에 너무 단편적이다. 인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나는  개의 알파벳으로 설명할  있는 평면의 사람이 아니며, 내가 살아온 인생 역시  개의 단어로 규정할  없다.      


삶의 모퉁이마다 내 안에는 늘 물음표가 한가득이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대학은 왜 가야 하는지, 취업은 꼭 해야 하는 건지,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아이는 왜 낳아야 하는지...... 사람들이 꼭 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들 앞에서 나는 늘 직진하지 못하고 일단 멈춰 서거나 우회해야 했다. 동의할 수 없었기에. 몸이 따라가더라도 마음이 결국 따르지 못해 중간에 길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그런 날들 때문에 내게 남아있는 것들은 사실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학벌도 고만고만하고, 직장생활은 짧았으며, 모아둔 돈도 별로 없는 그렇고 그런 사람. 무언가 보여줄 만한 걸 남기려면 유명세가 있거나 긴 시간 해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그런 게 거의 없다. 그나마 있다면 작은 카페 하나를 9년째 지키는 일과 오랜 시간 글을 써온 일 두 가지뿐. 사실 그마저도 변변치 못하다. 카페는 작고 작아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고, 작가라는 수식어 앞에 나는 아직 그리 떳떳하지 않다. 어쩌면 내세울 게 없기에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온몸으로 거부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랜 시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몇 번의 직장생활을 겪고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게 무엇인지를 조금 알게 되었다. 그건 틀이었다. 인간이 오랜 시간 만들어놓은 틀을 나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대신 틀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왜 모두가 똑같이 살아야 하는가. 다른 것뿐인데 왜 틀리다고 할까. 내 안에는 늘 반항끼 가득한 내가 살고 있었다.     


나를 조금 알게 되니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무게감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들은 모두 던져버리고 그저 나로 서고 싶었다. 무게를 지닌 것들은 대부분 ‘부러움’과 ‘부끄러움’이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타인과 관련이 있었다. 타인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삶은 무게를 더해 갔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 길을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력 삼아 꾸역꾸역 걸어가다 보면 온 세상이 하얘졌다. 여기서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그런 나를 붙잡아 세운 건 결국 나였다. 부러움도 부끄러움도 모두 내려놓고 그저 나로 살자. 아무것도 없는 빈 몸뚱이 하나뿐인 나여도 괜찮다.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주문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그건 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었다. 그 여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깨고 난 후에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났다.      


이십 대에 MBTI 검사를 한 적이 있다. 십오 년쯤 지나 다시 검사를 하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인간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지표를 신뢰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분명 내가 달라졌다는 것. 어떤 게 진짜 나일까. 알을 깨고 나온 지금의 나는 타고 태어난 나일까, 아니면 수많은 시간들을 통과하며 만들어진 나일까. 오랜 세월 나를 숨기고 살거나 남을 따라 하며 살았으니, 타고 태어난 나를 알 수 있는 길은 파편 같은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것뿐. 아무리 조각들을 들여다보아도 나는 여전히 타고 태어난 내가 어떤 모습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질문을 내려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본다. 타고 태어난 나든, 깎이고 깎여 만들어진 나든 상관없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가장 나라고 생각하니 그거면 족하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싫어하는 건 또 무엇인지 선명히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내가 명확해질수록 세상을 알아가는 게 흥미롭다. 어릴 적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던 나는 뒤늦게 세상에 대해 하나씩 배워간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아갈수록 나는 더 단단한 내가 된다. 나는 나로 살아 더 평온한 내가 된다. 종종 나를 아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해도 결국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으니, 제대로 나를 알고 살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또 하나를 더하자면 그런 나를 사랑하는 것.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은, 아이가 나를 그저 나라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깨달았을 때였다. 아이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를 사랑한다.  사랑에 조건은 없다. 그저 나이기에, 그런 내가 엄마이기에, 아이들은 내게 사랑을 속삭이고  품에 와락 안긴다. 하물며 아이도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데, 내가 나를 사랑함에 있어 조건을 달고 싶진 않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일지라도, 아무 수식어 없는 나일지라도,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저 나라는 이유로.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MB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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