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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Oct 11. 2022

글은 사람을 담아내지만,

열번째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열번째 글쓰기 모임을 마쳤다. 어느덧 다섯 달이 흐른 .  끝자락에 시작한 모임이 세번째 계절 가을을 지나고 있다. 서늘한 아침의 문을 열고 이른 시간 카페에 모여든 사람들.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눈은 이른 아침인데도 반짝인다. 피곤한 몸을 끌고 왔지만 그럼에도 이를 극복하고 결국 테이블 앞에 모여든 힘을 재한 사람들.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발전시키고,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쌓아가는 사람들.  마음들이 나는  귀하다.


  모임을 하면서 종종 심리치료사 같다는 말을 듣는다. 글을 보면 쓴 사람이 보이는데, 그런 부분을 말로 옮길 때마다 듣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 스스로를 우쭐거리게 만들 수도 있어서, 들으면 기분이 좋지만 얼른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혹시 이런 점을 과하게 믿는 자신이 될까봐 미리 경계를 하곤 한다. 글에 사람이 드러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을 전부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그럼에도 글은 사람을 담아낸다. 글을 오래 지속적으로 읽다보니 어느 순간 그 안에 담긴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매직아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떼어내면 그 안에 숨은 그림이 입체적으로 눈에 들어오듯 어느 순간 글 속의 사람이 튀어나와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문장은 그냥 흘러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가리고 감추고 화려하게 꾸며내도 글은 어떻게든 사람을 담아냈다.


  너무나 큰 아픔이 배어있기도 했고, 담담하게 덮어버린 아픔이 스며 나오기도 했다. 짐짓 아닌 척 하지만 자신의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게 드러나기도 하고, 세상을 향한 강한 경계심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았다. 모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치유의 글쓰기를 알리기 위함도 있었지만, 이런 나의 눈을 어느 정도 스스로가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글만 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사람이 함께 보이기에 치유에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


  그런 내 시선에 속시원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들켜버린 자신의 모습에 민망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말을 전할 때의 내 표정이나 말투가 혹여 너무 단정을 짓지는 않았는지, 듣는 이에게 날이 선 말을 던져 죄책감이 느껴지게 하진 않았는지. 내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들을 모두 되짚어가며 오늘의 합평을 돌아본다. 그리고 내 시선을 신뢰하되, 틈을 꼭 남겨두리라 다짐을 한다. 나는 신이 아니니. 내가 보는 게 전부 맞는 건 아니니. 내가 보지 못하는 이면이 분명 존재할 터이니.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을 든다.


  앉아서 글만 쓰는 걸 경계한다. 어떻게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렵지만 세상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대면하고 느끼고 깨달은 걸 글에 담으려 한다. 치유의 글쓰기를 마치고 또 다른 글을 향해 나아가는 나에게 세상은 가장 큰 자극이자 배움터이니, 겁이 많은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 한다. 내가 세상을 만나는 창구 중에 하나가 글쓰기 모임이 되었다. 그저 글의 효능을 알리려던 제스처가 이제는 나를 세상으로 끌고 가는, 그렇게 느낀 것들을 글로 쓰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나는 도움을 주는 사람인가, 받는 사람인가. 경계는 늘 흐릿하다.


  그렇게 열번째 모임을 마쳤다. 그리고 또 다른 모임을 이제는 정말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다음 글감은 '시월'이다. 시월 시월 시월... 나는 시월을 입 안에 머금고 되풀이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 어떤 달보다 발음이 수월하고 부드러운 시월, 가을 한복판에 놓여 찬란하게 빛나다가도 다가오는 차가운 겨울의 예감으로 못내 쓸쓸해지는 달 시월. 내가 태어난 달이기도 하다. 여행중이었던 적이 가장 많은 달이기도 하고. 시월을 되뇌고 되뇌며 다음 모임을 기다린다. 그렇게 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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