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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Oct 11. 2022

실명? 필명?

  이상, 이문열, 황석영……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이 사실 필명이었다는  우연히 알게     전이었다.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실명이라 너무 순진하게 믿은 탓이었다.  쓰는 삶을 꿈만 꾸던 시절부터 이따금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는데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필명을 선택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궁금해졌다.  이름이 걸린 책을 낸다면 나는 실명을 써야 할까, 필명을 써야 할까. 흔한 이름을 가졌다면 실명을 쓰는    쉬웠을까. 등단을  것도 아니면서 고민은  진지했다.


  그러다 갑자기 필명을 정하는 일이 생겼다. 글쓰는 습관을 들이겠다며 한 플랫폼에 가입하던 중이었다. 그 플랫폼은 실명으로 활동할 것을 권고하고 있었는데 아직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초반부터 실명을 공개하기가 좀 꺼려졌다. 내 이름은 흔치 않아 내 글을 읽게 되면 나를 스쳐간 대부분의 사람은 한번에 나를 알아볼 것이었다. 좀 더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기성작가들처럼 실명 같은 필명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 불현듯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년 전 개명을 했는데, 아이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 새 이름을 지었다. 나도 그 친구처럼 아이들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오면 어떨까. 아이들이 이름에 담겨있으면 더 책임감을 갖고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원래 성인 ‘박’에, 첫째로부터 ‘현’을 둘째에게서 ‘안’을 가져와 이름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박현안이 되었다.


  크게 고민하고 지은 이름은 아니었지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이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감이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게 느껴졌다. 늘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글을 쓰고 싶다 생각했는데 그런 느낌을 주는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 더 좋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이름을 가벼이 여겼다. 그저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중 하나라고 생각한 것. 하지만 매일매일 이름을 걸고 글을 쓰다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들이 펼쳐졌다. 내 글을 주기적으로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과 온라인에서 대화할 때마다 박현안으로 불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이 확 줄어든 상황이었다. 실명은 하루 한번도 듣기가 어려운데 온라인에서는 수시로 현안님으로 불렸다. 어느 순간 그 이름에 너무 익숙하게 반응하는 나를 감지하게 되었다. 누군가 박현안하고 부르면 반사적으로 뒤돌아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함께 글을 쓰며 알게 된 몇 명이 나를 찾아 섬으로 온 것이다. 그들은 나를 현안님이라 불렀고, 그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반응을 했다. 어느새 그 이름은 내 것이 되어 있었다.


  일 년 남짓 박현안 이름으로 쓴 글이 어느덧 수백 개가 되었다. 이제 내 글과 내 필명은 한 쌍처럼 보인다. 내 글 옆에는 당연히 필명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갑자기 지은 이름이지만 이제는 그 이름이 내 안에서 커다란 한 축이 되었다고 느낀다. 실명은 아니지만 나와 분리할 수 없는 이름이 된 것. 필명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실명을 흘끔거리게 된다. 어딘가 방치해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도 조금 든다. 그리고 여전히 내 책을 낸다면, 이란 질문 앞에 실명과 필명을 양 손에 하나씩 올려두고 무게를 저울질한다. 어느 이름을 써야 할까.


  어린 시절 나는 내 이름을 싫어했다. 수많은 예쁜 이름을 놔두고 나는 왜 이렇게 중성적이고 흔치 않은 이름을 갖게 된걸까 싶어 어른들을 원망했다. 할아버지는 딸아이에게도 항렬을 넣어 이름을 지어주셨다. 내가 태어난 시절만 해도 남자아이가 아니면 항렬을 쓰지 않던 시절이었다. 왜 굳이 항렬을 넣어 이런 이름을 지으셨나 싶은 마음에 어른이 되면 이름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절대 변치 않을 마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십대가 되면서 의외로 나는 점점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성차별을 두지 않고 항렬을 넣어 이름을 지어주신 것도, 흔치 않아 특별함을 갖고 있는 것도, 한쪽 성별에 치우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내 이름을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커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내 실명을 애틋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명보다 더 존재감을 뽐내는 필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박현안 말고도 쓰고 있는 이름이 몇 개 더 존재한다. 다양한 글을, 여러 플랫폼에서 쓰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글의 종류와 게시하는 곳에 따라 이름을 바꿔가며 글을 쓰다보면 스스로 자아가 여럿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글에 따라 다른 자아를 꺼내는 건 내게는 무척 흥미로운 도전이다. 에세이를 주로 쓰지만, 에세이만으로 채울 수 없는 허기짐을 다른 글들로 채운다. 때로는 실랄한 비판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재기발랄한 청년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하나로 합쳐질  이름을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때와 장소, 만나는 이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는  본래 사람인데,  사람이 쓰는 글이라고 다를까.  사람이지만  안에 여러 모습이 존재하는 것처럼,  글이지만 서로 다른 글이기에 다른 이름으로 게시되는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어떤 글이든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는 . 거짓으로 글을 쓰는  결국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나 다름없다.  것이 아닌 것을  것인양 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부끄럽더라도 내가 깨달은 것까지만 글에 담으려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실명이니 필명이니 하는 고민은 부질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모두가 나이니.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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