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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Oct 25. 2022

시월의 이름은 여행

  시월 시월 시월...... 시월이란 단어를 입 안에 머금고 되풀이해 발음하는 걸 좋아한다. 바람이 빠지듯 툭 하고 터져나오는 시옷의 발음에 월이 붙으면 시월은 어딘가 헐렁하지만 단단한 가을을 담아내게 된다. 그렇게 매년 시월이 되면 입안 가득 시월을 물고 오감을 열어 가을을 느끼려 애를 쓴다. 시월에 남다른 애틋함을 갖고 있는 건 사실 내가 태어난 달이기 때문. 시월의 끝자락에 태어난 내게 시월은 아주 어릴 때부터 특별하게 기다려지는 달이었다.


  스물다섯,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난 곳은 유럽이었다. 그때도 시월이었다. 원래는 구월에 갈 예정이었지만, 일하던 곳의 부탁으로 한 달이 늦어져 결국 시월에 길 위에 서게 되었다. 홀로 선다는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며 잔뜩 흐린 하늘을 품은 런던 공항에 내렸다. 첫 숙소에 짐을 풀고 쫄래쫄래 길을 나섰다가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사람 하나를 붙들고 대뜸 물었다. 아 유 코리안? 철저히 혼자가 된 두려움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것. 낯선 땅 위에 처음 선 나는 어떻게든 말을 섞을 사람을 찾으려 했다.


  내 의지와 다르게 사람은 찾아지지 않았고, 나는 홀로 걷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나는 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왜 떠나온 건지, 지금의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여행은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삶은 어떤 그림인지...... 그렇게 나는 내 자신과 점점 친구가 되어갔다.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나를 따라오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홀로 떠나온 여행이라 두렵다며 함께 다니자고 제안을 해왔다. 처음에는 그러겠다 약속을 한 나는, 결국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미안하지만 혼자 다니고 싶다고. 사람을 찾아헤매던 나는 어느새 홀로인 게 더 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한참 골목을 쏘다니다 광장 한 켠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티없이 푸르고 공기는 딱 알맞게 선선하고 습도도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었다. 약속이나 한듯 똑같이 붉은 기와를 얹은 수많은 지붕 아래 울긋불긋한 단풍이 곱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 가을이구나 가을이었구나 시월이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의 한복판에 지구 반대편을 걷고 있구나. 뜨문뜨문 세상이 멈추는 순간이 있다. 우주의 중심이 내가 된 듯 모든 공기가 정지되고 오롯이 그 순간을 느끼는 나와 그 공간만이 존재하는 듯한 순간. 내가 그날 만난 건 그런 순간이었다. 너무나 가을가을했던 시월의 어느 순간.



이탈리아 피렌체 전경, pixabay



  스물아홉의 생일날, 시월의 끝자락에 나는 인도 타지마할 앞에 서있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온 여행이었다. 음력 생일을 챙기는 엄마와 우연히 같은 날 생일이었던 그해, 나는 새하얀 대리석이 깔린 건물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동이 터올 무렵 붉게 빛나는 대리석을 바라보며 그곳을 들어선 뒤 종일 걷고 또 걸었다. 시월은 걷기에 너무나 완벽한 계절이었다. 가장 인도같지 않은 너무나 티 없이 깨끗하고 맑은 그곳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신 축하한다고,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그날 나는 미역국 대신 신라면을 감격스럽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시월에는 유독 길 위에 서있었던 적이 많다. 친구들과 뉴질랜드 일주를 하던 때도 어쩌다보니 시월이었다. 남반구라 그곳의 시월은 봄이었고, 여기저기 갓 태어난 양들이 엄마 양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고속도로라기엔 너무나 좁고 좁은 도로를 달리다 양떼를 마주하면, 그 자리에 멈춰서서 양들이 모두 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푸르른 자연과 양떼들만 보이던 그 여행길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얼마나 찬란한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뉴질랜드 초원과 양, pixabay


  섬으로 이주해오면서 시월은 내게 좀 무서운 달이 되었다. 여전히 태풍의 발생 가능성이 남아 있는 시기의 끝자락이 시월이었던 것. 섬의 겨울은 칼바람 때문에 유독 혹독한데, 그 겨울을 앞두고 있다는 점으로도 가을은 더이상 낭만하지만은 않았다. 늘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가을이라 말해왔는데, 그런 가을은  이제 사랑하지만 두려운 계절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월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시월의 방랑과 추억 때문.


  추억들을 야금야금 꺼내 보면서 나는 현실의 무료함을 견딘다. 여행은 길 위에서 뿐만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와 기억을 재생할 때마다 되풀이해 떠나는 느낌을 내게 전해준다. 내가 현실을 누구보다 잘 견딘다면 그 힘은 여행으로부터 왔다. 인생을 모두 걸었다 생각했던 여행이 이제 남은 인생을 굳건히 버틸 영원한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 내 인생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단연 여행이다. 정처 없이 바람처럼 떠돌고, 시간의 결을 만지듯 수많은 찰나의 온도와 습도와 향기를 몸의 모든 감각을 열어 고스란히 느끼는 여행. 그런 순간의 기억은 내 몸 가장 깊은 곳에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시월을 마구마구 이야기하며 시월 안에서 한껏 뒹굴고 싶었다. 그렇게  기억 속에 저장된 꿈결 같은 시간 속의 시월을 모조리 끄집어내 누군가에게 퍼나르고 싶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내가 태어난 달이라고,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당신도 한번 상상해보지 않겠느냐고.  수만 있다면  기억 속으로 당신을 데려와 함께 자박자박 거닐고 싶었다. 꺼낼 때마다 여전히 가슴 벅차오르는 순간들.  기억의 힘으로 오늘을 산다. 그런 시월이다. 그런 귀한 가을이 흘러간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시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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