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국가들이 궁금했던 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같은 아시아인데도 이슬람 국가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결여되어 있는 국가에서 나고 자랐기에, 발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인도 여행을 마무리할 무렵이었고 선으로 연결할 수 있는 여행지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지도를 살펴보다 다음 여행지로 선택한 건 아랍 에미리트였다. 이슬람 문화가 낯선 내 입장에서 그나마 선택하기 좋은, 세계적인 도시 두바이와 아부다비가 있는 나라였다.
부유한 국가답게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인도에 머물다 간 곳이라 돈의 힘이 더 크게느껴졌다. 듣던대로 기름값은 정말 물보다 저렴했고, 아스팔트가 남아도는 나라라 그런지 웬만한 도로는 십차선이 넘어갔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도시를 만난 나는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신나게 쇼핑몰이나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그곳을 돌아다니면서 유독 눈에 띈 건 여성들의 감춘 욕망이었다.
이슬람 국가라고 여성들의 옷차림이 모두 같은 건 아니다. 나라마다 가리는 부위가 제각각인데, 이는 지리적인 영향이 큰 편이다. 유럽 인근인 튀르키예와 이집트, 요르단 등은 문화가 개방된 편이라 여성들은 머리를 가리는 히잡만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옷차림은 비교적 자유로웠고 코와 입을 가리지도 않았다.
지리적으로 유럽과 멀고 메카에 가까울수록 여성이 가려야 할 부위는 늘어났다. 아랍 에미리트도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머리를 가리는 히잡은 물론, 온몸을 가리는 차도르, 눈을 제외한 얼굴을 가리는 니캅까지. 온몸을 검은색 천으로 뒤덮은 여성들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건 딱 세 부위였다. 눈과 손 그리고 발.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 여성들의 눈화장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듯 꼼꼼하고 정교했으며, 손톱과 발톱은 말끔하게 손질돼 있고 화려한 색깔이 칠해져 있었다. 걸으며 발을 내딛을 때마다, 손을 들어올릴 때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흘끔흘끔 보이는 그 감춰진 욕망은 너무나 아름다운 동시에 안쓰러웠다.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까.
절정은 두바이의 한 바닷가에 위치한 화장실에서였다. 바닷가마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아랍계 남성이나, 유럽계 남성과 여성이었다. 아랍계 여성들의 수영은 금지돼 있었다. 여행을 다니다 물만 보이면 뛰어들어 놀던 나는, 그날도 한창 물에서 놀다 나온 참이었다. 그러다 인근 화장실에 갔는데 그곳에 차도르와 히잡, 니캅을 벗어던진 한 여인이 서있었다. 여인이 걸친 옷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온갖 색색깔의 무늬가 수놓아진 옷은 가려져 있던 탓이었을까. 세상 가장 눈부셔 보였다. 화장실을 나갈 무렵 여인은 다시 시커먼 천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겨야만 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여성들의 옷차림이 궁금해진 건 그 다음이었다. 온몸을 가리고 있는 여성들과 마주할 때마다 내 눈은 자연스레 그 안의 진짜를 쫓고 있었다. 왜 감춰야만 할까. 왜 여성만 그래야 할까. 얼마나 저 검은 막을 걷어내고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까. 절제해야만 하는 세상이지만, 자신을 어떻게든 드러내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여성들의 마음만은 결코 감출 수 없어 보였다.
이슬람 국가만 골라 다녔나 싶을 정도로 그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궁금했다. 아랍 에미리트를 떠나서도 요르단, 이집트, 튀르키예를 기웃거렸다. 시리아나 이란을 가려고도 했지만 시리아는 동선이 어긋나 가지 못했고, 이란의 경우 외국인 여성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아 갈 수 없었다. 이란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가장 심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라크도 가고 싶었지만 당시는 전쟁 중이어서 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태동한 곳이라는 점만으로도 너무나 밟아보고 싶은 땅이었지만, 몇 십 년 후쯤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곳을 밟을 날을 나는 여전히 고대한다.
편견을 버리고 이슬람 국가를 누비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내게 그곳 역시 사람들이 숨쉬는 곳이었다. 요르단이라는 낯선 나라에는 한국 브랜드의 중고 자동차들이 즐비했고, 한국의 오이지와 똑같은 맛과 모양의 음식이 존재했다. 이집트에서 당한 사기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바닥나 여행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내가 도착한 곳은 튀르키예였고, 그곳에는 내 상처를 다독이는 너무나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었다. 자신이 아끼는 과자와 음료수를 몽땅 내게 건네고 해맑게 웃던 순수한 영혼들.
내가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랍의 봄'은 시작되었다. 30년 넘게 철권통치를 해온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리비아의 카다피가 차례로 무너졌고,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으며, 이라크 전쟁이 종전됐다. 내게 사기를 칠 수밖에 없을 만큼 고된 삶을 살았던 이집트 사람들을 응원했고,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다시는 가기 싫었던 이집트를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로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십년 뒤 오랜 세월 가장 억압돼 있었던 이란의 여성들이 히잡 의문사에 반발해 반정부 시위에 나섰고, 어느덧 두달이 흘렀다. 그동안 시위에 나섰다 숨진 사람만 300여 명에 달한다.
히잡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지, 애초에 여성을 가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이슬람 문화를 누구보다 인정하지만, 억지로 해석한 교리를 들이대며 여성들을 끝모를 억압으로 밀어붙이는 권력까지 옹호할 수는 없다. 무슬림 여성들이 보여준, 검은 막을 뚫고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자 애쓰던 그 감춰진 욕망을 나는 제자리에 돌아와서도 자주 떠올린다. 인간은 누구나 나로 살아야 행복하다. 무슬림 여성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누구보다 자신으로 살고싶을 것이다. 이를 막는 모든 행위는 부당하다. 스러져간 목숨들과 히잡을 벗어던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계속 오버랩된다. 진짜 '아랍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끝까지 응원할 것이다.
https://www.khan.co.kr/world/mideast-africa/article/20221110105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