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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Dec 15. 2022

왜 시민단체냐고 묻는다면,

밀도가 높은 사연을 다섯 편에 걸쳐 쓰고 나니, 에세이를 쓰기가 좀 힘들다. 사연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몰입해 써 내려간 것인데... 그래서일까. 어딘가 허전하다. 멍하다. 한파가 몰아쳐 섬에도 눈이 좀 왔고, 며칠 매섭게 불던 바람이 오늘은 좀 잠잠하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나타날 때마다, 눈이 녹아 채 마르지 않은 지표면의 물기들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바람이 멈추니 공기가 제법 온화하게 느껴진다. 이게 마법 같은 섬의 날씨. 츤데레가 따로 없다.


이제는 울컥하지 않는다. 쓰면서, 그리고 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종종 울먹였는데, 다 털어버리고 나서는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 그거면 된 거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의 사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쓰고 나니 투쟁의 역사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무얼 위해 싸우는지도 잘 몰랐는데, 돌이켜 보니 패배의 기록이 되고 싶지 않아 싸운 것 같다.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짓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다시 살고 싶었다. 그뿐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0일 페이스북에 10.29 참사와 관련해 이런 말을 쏟아냈다. “지금처럼 시민단체가 조직적으로 결합해서 정부를 압박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소비되다가 시민단체의 횡령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숨이 막혀왔다. 내가 이럴진대 유가족들은 어떨까.


반대로 묻고 싶다. 왜 시민단체가 나섰을까. 왜 나서야만 했을까. 시민단체란 무엇인가. 시민단체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정부 조직을 말한다. 왜 인간은 조직을 만들어야 할까. 10.29 참사 유가족은 왜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조직적으로 나서야 했을까. 개인은 무시 당하기 때문이다. 한 명은 약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목소리는 달라진다. 더 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더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정부는 유가족들이 함께 얼굴을 맞댈 수 있도록 배려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함께 모일 수 없도록 방해를 해왔다. 장례식도 뿔뿔이 흩어져서 치러야 했고, 면담의 경우도 개별로만 진행하려 한다. 이런 정부 아래에서 유가족들이 모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시민단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피해자가 됐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모를까. 피해자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처음이니까. 당황스러우니까. 충격 속에서 감정을 추스르고 길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걸 알려주고,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이 시민단체에 있다. 나 역시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길을 잃고 허우적대다 가해자보다 먼저 그 바닥을 떠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대신 나서서 하고 있다. 그게 그들의 존재 이유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가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유족들을 도와주는 장례지도사처럼. 감정이 앞서는 상황에서 이성을 앞세워 문제를 정면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이들이 바로 시민단체다.


정부가 먼저 자리를 마련하고 유가족들이 모일 수 있도록 배려했다면, 정부가 먼저 경청하고 이를 토대로 대책을 마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면, 시민단체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유족들 동의 없이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만들어 운영했고, 위로금도 애도 기간도 모두 유족의 의견은 묻지 않고 결정했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 경청과 동의가 먼저다. 이후 행동에 나설 수 있다. 하물며 희생자 가족이다. 이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는 건 의미가 없다. 유족들이 원하는 건 조치가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잃은 소중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사람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그 마음을 공감받길 가장 먼저 바라기 때문이다. 행동과 조치는 그 이후여야 의미가 있다.


10.29 참사   생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일까. 나머지 생존자는 안전할까. 일대일로 트라우마 치료에 나서겠다던 정부는 어디로 갔을까. 그날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넘쳐나는데, 정부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교묘하게 피해 가려는 모습이다. 마주해야 해결책을 찾을  있다. 피하면 피할수록 문제는 꼬이고 만다. 사건을 해결하려면 사건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우리는 제대로 애도할  있고,  기억할  있다.


잘 기억한다는 건, 다시는 같은 비극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한 명 한 명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건, 결국 한 명 한 명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소중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 그게 그저 길거리에서 벌어진 참사라 한들 생명을 그렇게 가볍게 볼 수는 없다. 159명이 죽은 게 아니라, 한 명이 죽은 159번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 숫자의 무게를 가벼이 여길 때, 문제는 더 꼬이고 피눈물 흘리는 날들은 길어진다.


악의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입을 막고, 우리는 들어야 한다.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깊은 상흔은 빨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말뿐이었던 상흔도 털어내는데 십수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의 상흔은 영원히 아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 연대해야 한다. 그들의 아픔을 나눠야 한다. 그래야 남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숨을 쉴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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